워싱턴DC는 지난 1790년 미국의 행정수도로 건설됐다. 대규모 건설인 만큼 흑인 노예의 노동력에 의지했다. 워싱턴은 노예무역의 주요 거점이기도 했다. 버지니아의 담배 농사가 쇠락하면서 목화 농사가 확대되던 남부로 노예들이 팔려 갔는데 대부분의 거래가 이곳에서 이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흑인 차별 규탄 시위가 격렬하게 펼쳐지는 백악관 앞 라파예트 광장은 대표적인 노예시장 중 하나였다.
비무장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 의해 목 눌려 죽은 지 오늘로 꼭 한 달이다. 라파예트 광장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흑인 차별을 규탄하는 구호가 터져 나온다. 시위가 격렬했던 초반에는 경찰이 광장 주변에 8피트 높이의 철조망을 설치해 시민들의 접근을 막고 동서남북을 잇는 도로까지 봉쇄했었다. 세인트존스 교회로 향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길을 열기 위해 최루탄과 기마대가 동원됐을 때는 국가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듯 섬뜩하기까지 했다.
라파예트 광장을 가득 채운 구호 사이로 구슬픈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성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다. 2015년 백인 청년의 총기 난사로 흑인 9명이 숨진 후 추도식에 참석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눈물을 삼키며 불렀던 곡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통해 분노와 좌절이 아닌 화해와 용서를 청했다.
저항의 몸부림이 거세질수록 그늘에 은폐됐던 차별과 혐오는 민낯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K방역으로 전 세계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던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다. ‘숨을 쉴 수 없다’는 플로이드의 외침은 우리네 일상 곳곳에 숨어 있던 차별과 배제, 불평등을 끄집어내는 구호로 다시 태어났다. 이주 노동자, 장애인, 성 소수자, 일용직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경계 밖으로 몰아세우고 혐오의 칼날을 들이대는 위선을 맞닥뜨린다.
‘이태원 클럽 사태’를 계기로 성 소수자를 향한 낙인과 혐오가 폭포수처럼 쏟아졌고 쉼터에 지친 몸과 마음을 기댔던 중국 동포에게는 “조선족은 바이러스”라는 비수가 꽂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몰고 온 경제 위기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플랫폼 노동자에게 더욱 가혹했다. 나라 밖 폭력에는 분노하면서 우리 내부에서 은밀하게 자행되는 폭력과 차별에는 눈 감았던 몰염치와 무감각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에서는 코로나19를 겪으며 ‘나도 언제든 차별의 대상이나 소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시민이 10명 중 9명에 달했다. 그런 면에서 코로나19는 우리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매우 강력한 방식으로 보여준 셈이다. 누군가를 향한 차별과 배제, 혐오의 활시위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향할 수 있다는 당연한 이치를 깨닫게 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새처럼 하늘을 나는 방법을 배웠고, 물고기처럼 바다를 헤엄치는 방법을 익혔지만, 함께 살아가는 그 간단한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한탄은 수십 년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피부색이 달라서, 장애 때문에,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감내해도 되는 차별이나 모멸은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두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 그 어떤 것도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제1의 원칙을 넘어설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외침이 지구촌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언제쯤 이 피맺힌 절규가 ‘모두의 생명은 소중하다(All Lives Matter)’로 수렴될 수 있을까. 시인 정현종은 작품 ‘섬’에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썼다. 정처 없이 떠도는 작은 배 한 척이 거친 파도를 피해 빈약한 몸뚱이를 의탁하는 그 섬은, 무너진 삶을 복원하는 최후의 보루일지 모른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생명이 차별 없이 존중받는 그 날, 우리는 그 섬에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자리한 그 섬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소리쳐보자. ‘모두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어서 빨리 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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