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 소프트파워는 두말할 나위 없는 챔피언급이다. ‘강남스타일’을 비롯해 방탄소년단(BTS)과 루나 등 K팝 밴드, 오스카상을 수상한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강렬하게 뻗고 있다. 한국의 화장품, 음식, 패션, 가전제품 등 지구상에서 인구 5,100만인 이 나라의 문화적 영향을 받지 않는 나라는 없다 해도 과언 아니다. ‘단색화’의 추상화가들이 뉴욕의 블루칩 갤러리에서 정기적으로 전시하는가 하면 지난해 10월 재개관한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한국미술가 양혜규의 작품을 돋보이는 공간에 배치했다. 그러나 미국 관객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 현대미술의 전모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미국 3대 일간지 뉴욕타임스의 6월25일(현지시간)자 문화면 기사는 이러한 설명과 함께 “지금까지의 한반도 근현대미술을 조망하는 가장 중요한 영어 개괄서”라는 책 한 권을 소개했다. 신문이 전면을 할애해 “대단한 신간”이라고 극찬한 책은 세계 3대 아트북 출판사인 영국 파이돈(PHAIDON)이 출간한 ‘1953년 이후의 한국미술:균열,혁신,교류(Korean art from 1953: collision, innovation, interaction)’이다. 전후 한국 현대미술을 포괄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영문판 서적인데다, 작품 감상 수준의 인상비평을 넘어선 학술 서적이면서도 총천연색의 도판들을 대거 수록해 눈길을 끈다. NYT가 보도하던 날 아마존 미술서적 부문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한 이 책은 K팝·K무비·K드라마 등 다른 한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각을 보이지 못했던 K아트가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책의 시작은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인 김선정 큐레이터와 미술이론가인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의 5년 전 ‘무모한 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2015년에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전후 한국 근현대미술의 개론서를 만들어보기로 의기투합했다. 최근 아트선재센터에서 만난 김 대표는 “2009년 미국 LA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당신의 밝은 미래’라는 대규모 한국 현대미술전을 기획했다. 그때 서구 관객의 시선에서는 우리 미술이 마치 비엔날레의 유행을 좇는 것으로 보이는 게 안타까워 우리 현대미술을 알릴 미술사 책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출간 계기를 밝혔다. 정 교수도 “2007년부터 3년간 뉴욕주립대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가르쳤는데 중국, 일본에 비해 한국미술사에 관한 영문 서적은 김영나 교수의 20세기 미술사, 브리티시뮤지엄이 출간해 전통미술부터 북한미술까지 포괄한 책 등 극히 적다는 사실에 상심했다”면서 “특정 작가들의 개별 카탈로그만 있고 전후 한국미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책은 거의 없어 언젠가 꼭 쓰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책이 기대 밖의 큰 주목을 받는 데 대해 “2010년 이후 서양 중심이던 문화적 규율이 무너지면서 서구적 미술사를 반성하는 움직임이 일었다”고 전했다.
이번 책은 정 교수와 김 대표 외에 미술사학자인 킴벌리 정 캐나다 맥길대 교수, 시각 문화학자인 키스 와그너 영국 런던칼리지 교수 등 4명이 공동 에디터로 참여했다. 근대인이자 화가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이쾌대의 ‘자화상’을 첫 작품으로 박계리,김이순,신정훈,이영준,홍지석 등이 근대에서 현대로의 전환기 한국미술과 북한미술을, 4명의 에디터와 고동연,최정은이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술과 페미니즘,비엔날레를 통한 교류, 미디어아트 등을 다뤘다. 두 사람은 “흔히 미술사 책은 화집이나 커피테이블북(거실 탁자에 놓여 주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책)으로 통하지만 이 책은 그림이 많으면서도, 다양하고 다이내믹한 한국 현대미술을 학문적으로 잘 보여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내 출판시장에서 미술서적의 좁은 입지를 고려하면 이 책의 한국어판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한국 미술에 대한 해외에서의 반응은 앞으로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두 사람은 내다봤다. 정 교수는 “최근 10년 새 한국 현대미술로 논문을 쓰는 외국인 연구자들이 많아져 향후 10년 내 다양한 한국미술 책이 나올 것 같다”고 전망했다. 김 대표는 “지금껏 한국 미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줄 학술연구와 평론이 부족했는데, 이 책이 세계 미술사에서 한국 미술사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을 다시금 새겨줄 것”이라고 말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사진 이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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