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해양수산부 공부원이 북한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사건을 두고 사망한 이모(47)씨의 ‘월북’ 논란이 한창이다. 군과 경찰, 정부, 여당은 연일 앞다퉈 “월북 시도 사건”임을 강조하지만 북한은 월북을 언급하지 않았고 유가족도 이씨에 월북 의지가 없었다고 확언하고 있다. 무엇보다 상당수 국민들은 ‘월북’ 논란 자체가 사건의 본질이 아니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씨에게 월북 의지가 있었든 없었든 북한이 비무장의 대한민국 국민을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게 사건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는 “국민들이 평화를 체감하고 있다”는 그간 정부의 주장과도 배치되는 사건이다. 사실 이씨의 월북 시도 여부는 정치적 책임의 경중을 따지는 게 급한 우리 정부와 군, 북한 당국에만 중요한 사안이다. 대다수 일반인들은 우리 국민을 대하는 북한의 비인도적 태도 그 자체에 충격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이 같은 태도가 ‘국정농단’ 사태 당시 태블릿PC의 출처로 관심을 돌리려던 박근혜 전 대통령 측과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의 전략과 유사하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이런 와중에 정부 여당은 아무렇지 않게 북한 개별관광 결의안을 국회에 상정해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 상황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판문점 견학, 비무장지대(DMZ) 평화의 길 걷기 사업도 조만간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與 “박근혜 땐 우리가 사살”... 野 “북한군이 우리 대신 총살했나”
해양경찰청은 지난 29일 브리핑에서 국방부 첩보 자료 등을 토대로 “이씨가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해경은 “표류 예측 결과와 실제 실종자가 (북한에서) 발견된 위치는 상당한 거리 차이가 있다”며 “인위적인 노력 없이 실제 발견 위치까지 표류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신동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도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9월에 40대 민간인이 월북하려다 우리 군에 의해 사살당한 사례가 있었다”며 “자진 월북자를 잡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무력 충돌을 감수했어야 한다는 무모한 주장”이라고 정부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이씨 형 이래진(55)씨는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해경이 최소한의 사건 현장조사, 표류 시뮬레이션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월북을 단언하고 있다”며 “빚이 있다고 해서 월북한다면 그게 이유가 되느냐”고 비판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도 페이스북에서 “정부·여당이 월북으로 몰고간 속내를 신 의원이 잘 말해줬다”며 “북한이 우리 군 대신 총살시켜줘서 감사해야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비꼬았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도 “신 의원이 군대를 안 다녀와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원래 전방에서는 정지명령을 거부하고 월북을 기도하는 이들은 ‘대북 용의자’로 간주하고 사살하게 돼 있다”며 “하지만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오는 북한 사람을 남한군이 사살했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반인도적인 처사일 것이고 지금 북한에서 한 일이 바로 그것”이라고 반박했다.
곳곳에서 “월북이 아니라 北 만행이 사건 본질” 비판
정부가 사건 초기부터 “이씨는 자진 월북자”임을 유독 강조한 것에 대해 “사건의 본질을 호도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나왔다. 이씨가 설령 월북하려다 피살됐다 하더라도 북한의 야만적 만행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는 게 요지다. 쟁점도 아닌 ‘월북’을 검증하기 위해 정부기관이 이씨의 채무관계 등 개인사를 지나치게 노출하는 행위도 비판 도마에 올랐다.
실제로 군인권센터는 지난 25일 성명서를 통해 “이 사태의 본질은 북한군이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을 위반하여 재판도 없이 약식으로 민간인을 까닭 없이 사살하고 시신까지 훼손한 것”이라며 “어떠한 이유로도 군인이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함부로 살해하는 일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비서 성추행 의혹 사건의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도 27일 페이스북에 “이혼한 사람, 빚 많은 사람, 월북한 사람은 총 맞아 죽어도 되느냐”며 “무장하지 않은 사람을 총으로 사살했다는 것이 핵심 아니냐”고 반문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어떤 경위든 이씨는 ‘보호받아야 될 시민’이었다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신뢰도를 두고 논란은 있지만, 25일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가 청와대에 보낸 통지문에도 이씨의 월북 의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북측은 통지문을 통해 이씨가 신원확인 요구에 “처음에는 한두 번 ‘대한민국 아무개’라고 얼버무리고는 계속 답변을 안 했다”고 주장했다. 토마스 오헤아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은 30일 미국의소리(VOA) 방송과의 전화 통화에서 “김정은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것은 중요한 몸짓이지만 사과는 아니다”라며 “끔찍한 인권 유린의 책임이 총격을 가한 당사자뿐 아니라 북한의 더 높은 권력자에게 책임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와중에... 與 ‘북한 개별관광 결의안’은 외통위 상정
이런 가운데 지난 9월2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가 전체회의를 열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북한 개별관광 허용 촉구 결의안’을 상정한 점도 구설수에 올랐다. 북한군이 이씨를 사살할 명분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밖에 없는데, 외부인이 들어오면 총까지 쏘며 예민해 하는 시점에 하필 개별관광을 서두르려는 이유가 뭐냐는 지적이 잇따랐다. 해당 결의안은 자칫 현 상황에서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 사건 악몽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안이기도 했다.
국회법에 따르면 결의안은 위원회에 회부된 지 50일이 지난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전체회의에 자동 상정된다. 이날 외통위 회의에서는 ‘한반도 종전선언 촉구 결의안’도 함께 상정됐다.
다만 국민의힘 의원들이 공무원 피격 사건 직후 해당 결의안들을 상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두 안건은 안건조정위원회로 넘어갔다. 안건조정위는 상임위에서 법안·결의안 등에 대한 이견을 조정할 필요가 있을 때 여야 동수로 구성된다. 안건조정위는 최대 90일간 안건을 심의할 예정이다.
야당 간사인 국민의힘 김석기 의원은 “우리 국민이 북한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생명을 잃고 있는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개별관광을 하자는 이런 것(결의안)을 국회에서 추진하는 게 도대체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우리 국민의 피격 사건엔 야당 의원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울분을 갖고 있다”며 “다만 국회는 절차에 의해 진행하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한편 이날 북한군의 우리 공무원 사살 사건에 따른 대북 규탄 결의안은 여야 합의 불발로 결국 채택이 무산됐다.
文정부 판문점 견학, DMZ 평화의 길 걷기 사업도 곧 개시
북한 금강산 개별관광은 여당뿐 아니라 문재인 정부 자체가 오랫동안 추진해온 숙원 사업이기도 하다. 국제 제재를 피해 남북 대화 물꼬를 트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도 취임 전부터 “개별관광은 금강산 문제의 창의적 해법”이라며 그 필요성을 공식 석상에서 수차례 언급했다.
이 장관과 통일부는 이와 별도로 이르면 이달이나 내달께 판문점 견학을 전격 재개할 것으로 전망된다. 판문점 견학은 지난해 10월부터 아프리카돼지열병 방역 차원에서 제한돼 왔다.
유엔군사령부는 9월28일 보도자료를 통해 “로버트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비무장지대 공동경비구역(JSA)에서의 유엔사 교육 및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의 재개를 승인했다”며 “곧 일반 대중에게 재개일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에 통일부는 “코로나19 방역 상황을 보고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결정할 예정”이라며 “현재 정해진 바는 없다”고 조심스러워 했다.
통일부의 DMZ 평화의 길 사업도 내년부터는 본격 궤도에 오를 전망이다. 이인영 장관은 9월16일 판문점을 들러 “코로나19 상황이 완화되면 10월부터라도 판문점 견학과 DMZ 평화의 길 사업을 신속하게 재개할 것”이라며 “2017년 한반도에서 전쟁을 이야기하던 일촉즉발의 상황에 비하면 지금은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고 국민들께서 평화를 더 많이 체감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고 주장했다. 같은 달 4일에는 최문순 강원도지사를 만나 “우리 국민 모두가 DMZ 평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그 마음이 북쪽에 있는 당국자나 동포들한테도 그대로 전달될 것”이라며 “내년부터 조금씩 평화의 길을 이어가는 그런 사업들,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실제로 걷는 이런 사업들을 하는 데 많은 협조를 구하고 싶다”고 당부했다.
다만 정부의 이 같은 구상도 최근 피격 사건에 대한 추석 여론 동향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통일부는 이씨가 북측 해역에서 사살된 다음날인 9월23일 의료물자의 대북 반출을 승인한 것으로 드러나 이미 강한 비판 여론을 겪은 상태다.
김정은은 정작 “금강산 남측시설 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져”
정작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10월 금강산 현지지도에서 남측 시설을 모두 철거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당시 김정은은 “손쉽게 관광지나 내어주고 앉아서 득을 보려고 했던 금강산이 10여년간 방치돼 흠이 남았다고, 땅이 아깝다고,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남측)의존정책이 매우 잘못됐다”며 “우리 땅에 건설하는 건축물은 마땅히 민족성이 짙은 우리 식의 건축이어야 하며 우리의 정서와 미감에 맞게 창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시설들을 남측의 관계부문과 합의해 싹 들어내도록 하고 금강산의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봉사시설들을 우리 식으로 새로 건설해야 한다”며 “지금 금강산이 마치 북과 남의 공유물처럼 북남관계의 상징, 축도처럼 돼 있고 북남관계가 발전하지 않으면 금강산관광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잘못된 인식”이라고 비판했다.
북한은 이후 여러 차례 우리 측에 통지문을 보내 금강산 남측 시설을 모두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올 6월4일 노동신문을 통해 담화를 내고 “남조선당국이 이번에 자기 동네에서 동족을 향한 악의에 찬 잡음이 나온 데 대하여 응분의 조처를 따라세우지 못한다면 그것이 금강산 관광 폐지에 이어 쓸모없이 버림받고 있는 개성공업지구의 완전철거가 될지, 있어야 시끄럽기밖에 더하지 않은 북남공동련락사무소 폐쇄가 될지, 있으나 마나 한 북남군사합의파기가 될지 하여튼 단단히 각오는 해두어야 할 것”이라며 금강산 관광 폐지를 기정사실화하듯 언급하기도 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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