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를 만들고 나서 저절로 나무가 자라듯이 1인 출판도 나오고, 모험적 책도 나오고, 작가들도 뭔가 열심히 하게 되고, 서점들도 생겨났습니다. 신기하게도 자발적으로…. 지금 정부는 시민의 자발성에 빚을 지고 있는 정부잖아요. 작은 씨앗들이 막 자라나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인데…”(소설가 한강)
“숲은 숲대로 있어야 하고, 도심은 도심대로 있어야 합니다. 전혀 작동 방식이 다르니까요. 숲과 도심의 경계가 도서정가제입니다”(시인 박준)
도서정가제 일몰 시점이 다음 달 20일로 다가온 가운데 국내 작가들도 도서정가제 지지에 힘을 보태고 나섰다. 대표로 소설가 한강과 시인 박준이 6일 서울 마포구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열린 작가 토크에 참석해 도서정가제 필요성을 창작자의 입장에서 호소했다. 또 이날 한국출판인회의는 작가 토크에 앞서 전국 작가 대상 도서 정가제 관련 설문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설문에 응한 작가들의 70%는 유지 또는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강은 이날 오후 열린 작가 토크에서 “지금 소설을 마무리 중이기는 하지만 (도서정가제가)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서 왔다”고 밝혔다. 한강은 “도서정가제가 개악됐을 경우 이익을 보거나 뭔가 손에 쥘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일 것”이라며 “주로 작은 사람들, 출발선에 선 창작자들, 작은 플랫폼 가진 사람들, 뭔가 자본이나 상업성을 넘기 위해 모색하는 사람들, 모색한 걸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강은 “ 아주 짧게 보면 (도서정가제 폐지가) 좋을 수도 있다. 재고를 쌓아놨던 큰 플랫폼에선 재고 처리가 가능하고, 독자들도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책을 싼값에 구입해 몇십만 원 이득을 볼 수 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어 “그런 잔치는 금방 지나간다. 도서정가제 도입으로 2만 종이 넘는 책이 늘어났는데, 태어날 수 있었던 책들의 죽음을 모르는 사이에 겪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준은 도서정가제가 사라지면 신진 작가들의 설 자리가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도서정가제로 신생출판사, 1인 출판사 등이 많아졌는데 이들은 기성 출판사와 다른 관점으로 책을 발굴한다. 출판물 다양성에 기여한다”고 설명했다. 또 박준은 출판 문화 생태계를 시장 경제 잣대로 봐선 안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박준은 “신인이나 원로나 인세가 동일하게 적용된다. 신인의 노력이든 원로의 노력이든 동일한 문화적 가치로 여기기 때문”이라며 “도서정가제라는 장치가 있어 이런 출판의 고유 문화가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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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작가 토크에 직접 나오지 않은 작가들 역시 도서정가제 지지 메시지를 냈다. 소설가 김연수는 “책의 미래는 베스트셀러를 싼값에 살 수 있는 컴퓨터 화면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시인 이병률은 “지켜주십시오, 따듯한 책방들을”이라고 전했다.
한편 이날 공개된 여론 조사 결과 작가들의 39.5%는 현행 도서정가제를 ‘유지’, 30.2%는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론 조사는 리얼미터를 통해 지난달 말 전국 3,500명 작가들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이중 1,135명이 응답했다. 신뢰도는 95%, 표본 오차 ±2.9% 수준이다.
작가 권익 신장에 대한 도서정가제에 대한 기여도에 대해서도 ‘도움이 된다(47.1%)’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33.0%)’보다 응답률이 1.5배 높았다. 도서정가제가 가장 도움되고 있는 분야를 묻는 항목에는 복수 응답으로 △가격 경쟁의 완화(62.85%) △작가의 권익 신장(58.5%) △동네서점의 활성화(54.8%) △신간의 증가(31.7%) △출판사의 증가(18%) 등을 꼽았다. 도서정가제 도입 이후 독립서점이 증가한 데 대한 평가도 긍정적이었다. 66.3%는 독립서점 증가가 ‘독서환경 개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설문 결과에 대해 김학원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은 “앞서 실시한 출판사, 서점, 독자 대상 여론 조사까지 종합해보면 85% 이상이 출판문화산업을 지식, 교육, 문화 산업의 근간으로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며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소모적이고 반문화적인 ‘책값 추가 할인’ 요구를 즉각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판계는 문체부가 지난해 7월 출판·전자출판·유통·소비자 단체 등 13곳 대표가 참여하는 민관협의체를 구성해 도서정가제 유지를 합의했었음에도 최근 ‘소비자 후생’을 내세워 도서정가제를 ‘재논의’ 트랙에 올린 것을 두고 도서 할인 폭을 키우려는 의도라고 보고 있다.
이처럼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문체부는 “검토 중”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세부방안이 확정된 것이 아니다. 출판산업 생태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여러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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