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도널드 트럼프를 연설의 달인이자 전도유망한 정치인으로 성장시켜준 곳은 세계 최대 보수정치행사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다. 트럼프가 CPAC 무대에 처음 올라선 것은 지난 2011년으로 이후 매년 빠짐없이 연사로 참석했다. 트럼프는 CPAC 행사 참석자들의 최고의 스타이자 아이돌이었다. 2015년 행사에서도 어김없이 현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든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연설이 끝난 뒤 맷 슐랩 CPAC 의장이 대선 출마를 권고했고 그때 결심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미국에서도 대권을 잡으려면 강력한 팬덤 확보가 승리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보다는 팬덤의 욕망에 부응해야 살아남는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학계에서는 ‘정치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평가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미국에서 정치 팬덤 가능성을 처음 보여준 ‘원조 스타’는 2004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섰던 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다. 그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전에 반대하는 등 선명성 넘치는 공약과 다소 철없어 보이는 말과 행동으로 단숨에 큰 인기를 얻었다. 경선 출마 1년 반 전까지만 해도 무명 정치인이었으나 경선 기간 온라인을 기반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후보 중 가장 많은 4,100만달러(약 460억원)의 후원금을 모금했다. 다만 실제 경선에서는 중도 탈락의 쓴맛을 봤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당선 때 팬덤은 정치의 새로운 주체로 본격 자리매김했다. 그는 대선에 처음 출마한 2007년 출마선언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버락오바마닷컴’을 개설했다. 정책을 토론하고 직접 알릴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에 1,000만명 이상이 몰릴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오바마의 얼굴이 그려진 각종 상품 판매로 4,000만달러(약 450억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확보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직후 ‘정치의 죽음’이라는 평가를 받는 등 기존 정치 문법을 벗어나 ‘팬덤 정치’를 완성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경선 내내 입에 담기 힘든 인종·여성차별적 발언을 비롯한 각종 막말로 주류 정치권과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하지만 ‘앵그리 화이트’라는 강력한 팬덤을 얻었다. 실제로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유세 현장에는 입에 담기 힘든 구호가 넘쳐났다.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향해 ‘비치(bitch)’라는 외침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나왔고 성난 지지자들은 ‘힐러리의 목을 매달아라’라고 공공연하게 외쳤다. 여기에 러시아 대선개입 스캔들 관련 수사 결과를 발표한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 국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잇따랐다. 정치잡지 뉴리퍼플릭은 “여기 모인 군중의 마음속에는 다른 정의가 있다. 그들은 그녀의 죽음을 원하고 있다”고 과열 양상을 우려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을 준수하라는 사회적 요구에 반발하며 이민자 등 편 가르기 전술로 강력한 팬덤을 확보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학계와 정치권에서는 팬덤의 욕망에만 부응할 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공통된 가치가 사라지면서 ‘정치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우려 섞인 평가를 내놓았다. 2020 CPAC의 주제는 ‘미국 대 사회주의’였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2020 대선 메시지이기도 하다. 팬덤 정치로 정치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극단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가 또다시 팬덤 현상을 발판으로 재선에 성공할지 주목된다./박진용기자 yongs@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