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 사실상 확실시되면서 한국의 대북정책도 전면 수정이 불가피해진 게 아니냐는 진단이 고개를 들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톱다운(하향)’ 방식의 외교 정책 대신 실무협상을 앞세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선(先) 비핵화를 내세우며 제재를 유지하고 북미 간 직접 담판을 짓는 트럼프 식 ‘딜(거래)’ 방식은 배제할 공산도 크다. 이런 상황에서 임기가 고작 1년6개월가량 밖에 남지 않은 우리 정부는 일단 바이든 행정부를 설득해 ‘북미대화’와 ‘종전선언’ 협상판을 만들려는 노력에 서둘러 집중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 외교·안보 참모진 인선이 마무리될 내년 6~7월 전까지 우리 정부의 목소리가 적극 반영된 대북 기조를 만들어 보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수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은 국제 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수해 발생 등 3중고로 허덕이는 북한의 내년 초 도발 여부가 바이든 당선인의 대북 기조에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 지목했다.
바이든 ‘先핵포기’ 기조에 시간 쫓기는 文정부
대다수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바이든 당선인이 대북 정책에 관해서는 선(先) 비핵화 기조를 명확히 한 채 실무협상을 중시하는 ‘보텀업’ 방식을 선호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가 그간 진행해온 북미 간 가교역할의 상당 부분을 수정해야 할 수도 있다고 입을 모았다. 정치적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북한을 활용한 ‘깜짝 쇼맨십’을 즐겼던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바이든의 방식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결단’ 하나로 모든 것이 움직이는 북한 체제와는 엇박자를 낼 수도 있다는 진단이다.
실제로 바이든 당선인은 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지난 2013년 미국진보센터 주최 행사에서 “우리는 (대화할) 준비가 돼 있지만 북한이 진정한 협상에 나설 준비가 돼 있어야 가능하다”며 “과거에도 그들은 필요한 것을 얻으면 또다시 같은 도발을 감행하고 핵 개발을 추진했으나 위기를 조장하고 보상을 요구하는 북한의 반복된 태도를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2004년 미 상원 외교위원회 간사 시절엔 “북한 지도자들은 (핵) 무기를 정권 생존의 궁극적인 보증으로 여기는 만큼 무기 포기를 분명히 꺼린다”며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상대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대선 기간에도 김정은을 수차례 ‘폭력배’ ‘독재자’로 지칭하면서 트럼프 식 대북정책에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도 13일 합동군사대학교·한국군사학회 공동 주관 세미나에서 “바이든 당선인이 트럼프 대통령처럼 ‘톱다운’ 방식으로 깜짝 쇼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더욱이 바이든 행정부가 외교·안보 참모진을 완전히 구축하는 데는 최소 6개월가량의 시간이 걸리는 점과 코로나19 확산, 미중 갈등 대응이 시급한 상황에서 북한 문제는 후순위로 밀릴 수 있다는 점도 우리 정부엔 부담으로 지적된다.
인사청문회 등 새 외교·안보 라인 구축 일정을 감안할 때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 고위급과 접촉할 수 있는 시기는 일러야 내년 하반기일 것으로 관측된다. 공교롭게도 그즈음 한국은 차기 대선 국면에 돌입하게 돼 국정 동력이 떨어지게 된다. 북미 대화 재개는 물론 국제제재 속에서 작은 교류라도 추진해보려는 우리 정부의 시계와는 시간이 달리 가는 셈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한국의 일부 외교·안보 참모진을 미국 민주당계에 맞춰 올 연말께 상당폭 교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강경화 “바이든 측근들에 종전선언 설명”
우리 외교·안보 관계 부처 장관들은 당장 바이든 행정부 출범 대비에 잰걸음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한국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가 거둔 북미 합의 성과를 바이든 정부가 계승해 주길 우선 바라는 눈치다. 대북 전략이 확정되기 전 한국 정부의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해 보려는 시도다. 북미대화를 재개시키려는 정부의 절박함에서 나온 행보이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 같은 움직임이 현 트럼프 행정부와 바이든 캠프를 모두 자극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먼저 포문을 연 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다. 지난 8일 미국으로 떠났다가 12일 귀국한 강 장관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간단한 오찬 만남을 가진 뒤 새 행정부 국무장관 후보로 거론되는 민주당 크리스 쿤스 상원의원과 크리스 머피 상원의원 등을 잇따라 면담했다. 또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공화당 소속 제임스 리시 상원 외교위원장, 밥 메넨데스 상원 외교위 민주당 간사와도 만났다.
강 장관은 10일(현지시간) 워싱턴DC 주미대사관에서 특파원 간담회에서 바이든 측에 외교정책 자문을 맡고 있는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존 앨런 소장도 면담했다면서 “앨런 소장이 우리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주요 동맹 현안에 대한 입장을 당선인 측에 전달하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강 장관은 이어 미국에서 만난 인사들에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추진에 대한 우리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고 북핵 문제의 시급성을 고려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실현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강화해나갈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12일 귀국길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추진했던 종전선언이라든가 이런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오전 9시부터 14분간 바이든 당선인과 통화했다. 청와대는 두 사람이 한미동맹 강화에 공감했고 북핵 문제 해결에서도 긴밀히 소통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인영 “바이든, 겨레의 친구 되길... 트럼프의 북미 약속 지켜야”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미국 정권이 바이든 행정부로 교체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사이에 합의한 내용은 준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장관은 지난 6일 ‘남북생명공동체 실현과 평화경제 학술포럼’ 축사자로 나서 “많은 분들께서 저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물어 보시면 ‘누가 당선되더라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다’고 일관되게 말씀드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장관은 “과거 우리나라와 미국의 정권이 바뀌면 대북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이번만큼은 미국에 어떤 행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흔들림 없이 지속하겠다”고 다짐했다. 또 “기회가 되는대로 이러한 입장을 차기 미 행정부에 전달하고 초기부터 긴밀한 협력체계를 갖추어 가겠다”며 “정권이 바뀌더라도 (2018년 이후의) 남북·북미 간 합의들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조속히 이행돼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이 장관은 아울러 미국의 외교·안보 참모진 인선에만 6개월 이상 소요되는 점을 인정하면서 그 동안은 한반도 정세를 남북이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장관은 9일 열린 취임 첫 기자간담회에서 “미 대선은 코로나19 사태로 파생된 새 질서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큰 변곡점”이라며 “남북이 먼저 대화 물꼬 트고 신뢰를 만들면 정세의 흐름을 우리가 주도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어 북한을 향해서는 “전환의 시대에 신중하고 현명하고 유연하게 대처하길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이 장관은 또 “역사적으로 미국 정부는 동맹국인 한국 정부의 목소리를 경청해 왔고 미국의 대북정책 기조도 이에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아 왔다”며 “나는 진심으로 바이든이 평화의 현자가 돼 우리 겨레에 좋은 친구로 다가오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북은 바이든 당선에 침묵만... 김정은 공개활동도 없어
한편 북한은 미국 대선 결과가 사실상 확정된 지 한참 지난 현재도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 사실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김정은 역시 20일 이상 공개활동을 하지 않았다. 김정은의 공개 행보는 지난달 21일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 70주년을 맞아 평남 회창군 소재 중국인민지원군열사능원을 참배한 게 마지막이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그나마 ‘톱다운’ 방식의 정상회담 재개 가능성이 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기대했다가 결과가 반대로 나오자 대응 방안 마련에 고심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결과에 불복하며 소송전을 예고한 만큼 진행 상황을 더 지켜보겠다는 입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에 대해 이달 10일 기자들과 만나 그 이유가 트럼프 대통령의 승복 연설이 없기 때문인지는 단정할 수는 없다고 진단했다.
북한은 과거에도 미국 대선 결과에 대해 신속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장 빨랐던 사례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당선된 지난 2008년이다. 당시 북한 당선 결과 확정 이틀 만에 “공화당 후보인 상원의원 매케인을 많은 표 차이로 물리쳤다”고 보도하면서 내심 오바마의 승리를 바랐던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이 기대와 달리 ‘전략적 인내’ 정책을 펴자 2012년 재선 때에는 사흘 만에 논평 없이 사실만 전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6년 당선됐을 때는 이틀 만에 노동신문을 통해 보도하면서 아예 당선자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채 ‘새 행정부’라고만 표현했다.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과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지난 3일 국가정보원 국정감사 이후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과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대미 라인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으며, 특히 최 부상은 현재 대미 정책 수립에 전념하는 것으로 파악된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국내외서 내년 초께 北도발 가능성 경고 잇따라
이런 가운데 북한이 바이든 행정부를 시험하기 위해 내년 초께 무력 도발에 나설 수 있다는 경고는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미국의 새 대북정책에 주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수석차관보 출신인 에번스 리비어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2일(현지시간) C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몇 주 안에 북한이 핵실험이나 장거리 탄도미사일 시험을 하는 것을 목격할 수도 있다”며 “차기 대통령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크 피츠패트릭 전 미국 국무부 비확산담당 부차관보도 9일(현지시간) 자유아시아방송(RFA)을 통해 “바이든 당선인이 대통령에 취임하면 코로나19 해결 등 미국 내 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둘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북한이 핵 문제가 뒷전으로 밀렸다고 생각해 도발에 나설까 우려된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에 관여하겠다고 손을 내밀었던 2009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 초기에도 북한은 2차 핵실험을 단행했고 외교적으로 핵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잃었다”며 “북한이 도발에 나선다면 (바이든 행정부의) 협상 의지에 찬물을 끼얹게 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정책 조정관 역시 “중요한 것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실험 유예를 중단하고 도발에 나선다면 다시 미북 간 긴장은 고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커스 갈로스카스 전 미국 국가정보국(DNI) 북한정보담당관은 “북한이 내년 초 다탄두 재돌입 탄도비행체(MRV)를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담긴 기고문을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해리 카지아니스 국익연구소(CNI) 한국담당 선임국장 또한 최근 RFA에서 “김정은이 한국에 일종의 평화 제안을 한 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면 예전 각본으로 돌아가 긴장을 높일 것”이라며 북한이 ICBM 시험으로 타협을 시도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상숙 외교안보연구소 연구교수는 2일 보고서를 통해 북한이 내년 초 제8차 당대회 이후 “열병식에서 선보인 신형무기 시험을 통한 도발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도발 수위는 ICBM이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에 못 미치는 저강도 수준일 것으로 전망했다. 이 교수는 “(북한 입장에서) 새로운 행정부가 등장한다면 한반도 문제의 시급성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며 “협상이 재개되지 않더라도 북한의 핵 무력 증강에 따른 미국의 위기 대응 능력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간주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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