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영국 옥스퍼드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 truth)’을 꼽았다. 진실과 허위의 경계가 허물어진 시대 상황을 잘 대변하는 신조어라는 점에서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탈진실’은 사실보다 개인의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유명인이 격정이나 분노, 눈물 등을 앞세워 여론에 호소하거나 여론을 선동한 사례는 과거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세태는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한마디로 ‘개소리(bullshit)’가 난무하는 시대다.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은 말이 여론의 눈과 귀를 흐린다. 개소리는 도대체 누가 만들어 퍼뜨리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터무니 없는 개소리에 솔깃해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퓰리처상 수상 경력이 있는 젊은 저널리스트 제임스 볼이 저서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를 통해 개소리의 생산과 가공, 유통, 소비 과정을 정리하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했다.
책에 따르면 개소리는 거짓말(lie)과 엄연히 다르다. 거짓말은 명백하게 진실의 대척점에 존재하기에 위치 파악이 쉽고, 거짓임을 입증하기가 어렵지 않다. 반면 개소리는 진실이든 거짓이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럴싸한 허구의 담론이다. 사람들이 그저 솔깃해하기만 하면 된다. 개소리에 솔깃한 사람들이 주변에 자발적으로 퍼뜨리기까지 하면 개소리는 세상에 태어난 소임을 다하게 된다.
개소리는 애초 음지에 있었다. 비주류 세력이나 영향력이 떨어지는 가짜뉴스 사이트에만 머물러 있을 때는 크게 위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개소리의 생산과 가공, 확산을 가속화 했다.
인터넷 세상에선 생산자가 신분을 숨기거나 세탁하기가 쉬웠다. 책은 대표적인 인물로 영국의 극우 정치해설가 마일로 이아노풀로스를 지목한다. 그는 나이를 속이고, 이름도 바꿨다. 뚜렷한 가치관에 기반하지 않고 자극적 이슈를 따라가며 그저 이슈의 중심에 서려 했다.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의 고속 성장은 개소리의 확산을 이끌었다. 전문가보다 친한 친구를 더 신뢰하는 속성을 지닌 사람들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친구들의 포스트를 열심히 퍼 날랐다. 소셜미디어가 맞춤형 정보 제공이라는 미명 하에 이용자에게 편향 된 정보만 노출하는 필터 버블 현상도 문제였다.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달 속에서 인쇄 광고 등의 수익이 악화한 기성 언론은 ‘클릭 장사’에 현혹됐다. 따라잡아야 할 정보는 늘어났지만 이에 대응할 충분한 인력을 둘 예산 형편이 되지 않자 꼼꼼한 검증은 약해지고 다른 언론이 폭로한 내용에 분노를 조금 더 담아 기사를 재가공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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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016년 미국 대선은 개소리 세계화의 기폭제가 됐다. 저자는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가 “터무니없는 ‘사실들’로 이뤄진 수사적(rhetoric) 집속탄과 증명하기 어려운 의혹들을 제조했다”며 “경쟁자들조차 그의 연설 중 어떤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무시해야 하는지를 놓고 분열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그의 당선을 계기로 개소리는 사람들의 일상, 주요 국가 정책, 지도자 선정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중요한 영역을 파고들었다.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결정 과정에서도 사실을 기반으로 한 토론보다 자극적인 개소리가 유권자들을 자극했다.
개소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생산, 유통, 소비되고 있다. 표가 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은 개소리를 생산하고,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미디어들은 퍼 나른다. 사람들은 개소리에 더 솔깃해한다. 음모론에 쉽게 넘어가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는 인간의 심리를 감정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이다. 결국 개소리 시대가 열린 건 모두의 책임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동시에 저자는 누구나 현 상황에 책임이 있기에 누구나 개소리 생태계를 교정하는 데 관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 정치인에게는 개소리에 공격당할 경우 ‘설명하려 들지 말라’고 조언한다. 대응하면 할수록 늪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또 정치인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미디어 문해력을 높이는 교육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언론을 향해서는 복잡함이 미덕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제목만 읽고 퍼 나르는 사람들이 많아진 환경에 대한 대처법이다. 오보만큼 정정 기사를 널리 알릴 방법을 찾자고도 제안한다.
유권자와 뉴스 소비자들에는 “단 몇 초라도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한다. 어떤 자료를 공유하기 전에 스스로 최소한의 검증을 해보라는 의미다. 속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통계 상식도 가져야 한다. 정치 성향이 다른 매체가 만든 방송이나 기사를 보는 것도 유용하다.
영국 저널리스트가 쓴 책인 만큼 한국 사례는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남의 나라 사례들이 하나하나 익숙하다. 개소리 세계화의 시대, 저자가 제안한 해법은 우리에게도 충분히 적용할 만하다. 1만8,000원.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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