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시작해 보입시더. 레디 고우!” 낭랑한 목소리가 현장에 울려 퍼진다. 배우의 연기를 진지하게 주시하는 감독의 등 뒤엔 태어난 지 백일 된 아기가 업혀있다. 가부장적 분위기가 견고했던 1950년대, ‘여자는 자고로…’라는 사회의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삶을 개척한 여인이 있었다. 아이를 둘러업고 제작비를 구하러 다녔고, 자기 집에 세트를 지었다. 직접 밥 지어 동료들을 먹여가며 영화를 만들었다. 고상한 예술 아닌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사람.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1923~2017)의 삶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국립극장 기획 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을 통해서다. ‘아프레걸’은 6·25 전쟁 이후 등장한 주체적인 여성들을 지칭하는 당대 신조어다.
그동안 20여 편의 작품을 함께 하며 시대적인 문제의식을 대중적으로 풀어내 온 김광보(사진) 연출과 고연옥 작가가 또 한 번 힘을 합쳤다. 이번 작품이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뇌어 볼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는 김 연출을 연습이 한창인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박남옥. 김 연출에겐 낯선 이름이었다. 남긴 영화라곤 역시나 생소한 ‘미망인’이라는 작품 한 편뿐이고, 이마저도 흥행에 실패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평소 여성 서사에 관심 많던 고 작가의 소개로 관련 자료를 찾아본 김 연출은 드라마틱한 박남옥의 일생에 매료됐다. 김 연출은 “아기를 업고 영화를 촬영하는 박 감독의 사진 한 장이 굉장히 강렬했다”며 “이 분의 예술이란 것이 고상하고 특별한 게 아닌 생활과 맞닿은 무엇이라는 게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극 중 박남옥은 이렇게 말한다. “난 뭐 음청난 예술 할 생각 읎어예. (중략) 피비린내 나는 땅에서 살아가는 바로 우리 모습 이왕 한번 자세히 들이다 보자 싶어가 영화로 찍을라칸다 카면 느무 그창한가?” 여자가 어떻게, 애 엄마가 어디… 무수히 따라붙는 세상의 편견에도 박남옥이 힘차게 ‘레디 고우’를 외쳤던 건 영화를 특별한 무엇이 아닌 삶 그 자체라고 봤던 신념 때문 아니었을까. 김 연출은 새로운 세상을 연 여성, 도전하는 한 인간의 삶의 태도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울림이 되기에 충분해보였다”고. 그는 박남옥이 영화를 촬영하는 현재 시점과 과거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영화 ‘미망인’을 극 중 극으로 함께 펼쳐낼 계획이다.
이번 작품은 국립극장 전속 단체인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이 9년 만에 한 무대에 오르는 합동 공연이기도 하다. 장르적 색깔이 강한 각 단체의 장점을 전체 스토리에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 관건이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 산하 9개 예술단체 300여 명의 합동 공연 ‘극장 앞 독립군’을 지휘하기도 했던 김 연출은 “세 팀이 다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단체인 만큼 이질감이 없고, 오히려 접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며 “창극단이 전체 드라마를 이끄는 가운데 무용단은 역동적인 몸짓으로 극적인 장면을 표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주는 국악 관현악에 기타·드럼 등 밴드를 더해 가져가고 오페라 작곡가로 유명한 나실인이 음악 감독을 맡았다. 김 연출은 ‘극장 앞 독립군’ 작업을 함께했던 나 감독에 대해 “대본 이해력이 뛰어난 작곡가”라며 “관객들이 이해하기 쉬우면서 가슴에 와 닿는 좋은 음악을 기대해달라”고 강한 신뢰감을 표했다.
그 시절, 여자가 영화 한 편 찍는 게 그리도 힘들었다. 제작비 부족에 촬영은 수시로 멈춰 섰고, 후반 작업과 개봉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2020년, 공연 한 편 올리는 게, 관객과 만나는 게 기적인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김 연출은 “모두가 힘든 시기 ‘내 삶이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세상”이라며 “식상해도 ‘힘내서 해보자’는 말밖에 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온갖 시련에도 “안 된다는 말, 난 하나도 안 무서워. 내한텐 된다는 거 보다 안 된다는 게 훨씬 많거든”이라고 말하며 힘차게 달려나간 박남옥. 그녀의 강인한 에너지는 오는 23일부터 내년 1월 24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박남옥 역은 국립창극단 이소연, 객원 배우 김주리가 맡는다.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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