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업법이 무더기 통과된 후 제1 야당인 국민의힘을 이끄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174석 거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폭주’를 막지도 못한 채 당내 이탈표까지 생기자 ‘보수의 정체성’마저 흔드는 원인 제공자라는 지적이다. 민주당이 압도적인 의석수를 기반으로 기업 규제 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과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비준을 위한 3법(노동조합법·공무원노조법·교원노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지만 국민의힘 역시 무기력한 모습으로 사실상 방관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김 위원장의 ‘갈지자’ 행보로 보수 정당마저 경제계의 목소리에 등을 지고 존재감조차 잃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10일 서울경제가 규제 3법과 ILO 3법 의안별 표결 현황을 분석한 결과 법안 표결에 참석한 국민의힘 전체 재석 의원 중 18.5%가 찬성과 기권표를 행사해 여당의 입법 폭주에 동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에 반대하며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나선 김기현 의원마저 규제 3법 중 하나인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권력기관 관련 여당의 입법 폭주에는 강하게 반발하면서도 정작 기업 관련 입법 사항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슬그머니’ 찬성하는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의안별 표결 분석 결과를 보면 상법 개정안의 경우 국민의힘은 찬성표를 행사한 의원을 포함해 소극적인 기권으로 동조한 의원이 재석 의원 91명 가운데 15.4%에 달했다. 상법 개정안은 이주환·장제원·김태흠 의원이 찬성하며 기권 14명과 함께 17표가 이탈했다.
금융그룹감독법은 김기현 의원과 함께 권영세·김희곤·서일준 의원이 찬성했고 기권만 19표에 달해 재석 90명 중 20.7%가 경제계의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만만치 않았다. 권영세·정진석·김석기 의원이 찬성했고 15명의 의원이 기권하며 재석 의원 80명 가운데 14.4%가 이탈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정이 이렇자 경제계에서는 “보수 정당도 경제계를 버렸다”며 탄식이 이어졌다. 한 경제 단체 임원은 “제1 야당이 막지도 못할 공수처법에만 매달려 기업을 위기에 몰아넣은 셈”이라며 “김 위원장이 기업 규제 3법에 찬성한 까닭에 이탈표까지 생긴 게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김 위원장은 기업 규제 3법을 찬성한다고 공식화해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지난 9월에는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 김 위원장을 찾았지만 사실상 문전박대를 당하면서 반기업법의 무더기 통과는 일찌감치 예고되기도 했다. 국민의힘 이탈표는 결국 당 대표인 김 위원장의 눈치를 본 의원들의 부화뇌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은 김 위원장이 ‘자기 정치’에 몰두한 나머지 보수 정체성을 흔들고 있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실제 5월 당권을 확보한 뒤 김 위원장은 당내에서 보수라는 말을 쓰는 것조차 경계했다. 그는 국민의힘 전국조직위원장회의 비공개 특강에서 “진보·보수라는 말 쓰지 말라. 중도라고도 하지 말라”며 “정당은 국민이 가장 민감해하는 ‘불평등’ ‘비민주’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집단이라는 것만 보여주면 된다”고 말했다. 결국 보수의 본질을 외면한 김 위원장의 행보 탓에 ILO 3법에 찬성한 의원은 규제 3법보다 많았다. ILO 3법 가운데 노동조합법에는 최연숙·유경준·정찬민 의원이 찬성했고 공무원노조법은 김형동·황보승희·정찬민·김선교·최형두·서일준 의원, 교원노조법은 김형동·김희국·황보승희·정찬민 의원이 찬성했다.
이처럼 보수 정당이 기업의 노조 리스크를 키우는 선택에 방관 또는 찬성 입장까지 나타낸 것은 여전히 ‘웰빙당’에 갇혀 있어서라는 지적도 나온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20대 총선, 19대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1대 총선 4연패에도 단일대오를 형성해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며 “김 위원장과 당내 주류 세력 간 의견 불일치 역시 정체성 혼란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송종호·박진용기자 joist1894@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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