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두 발이 묶여버렸다. 연초부터 계속된 감염병으로 여행뿐만 아니라 외출하기도 부담스러웠던 한 해이지만 지금처럼 사람 만나기가 조심스러운 때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새해에 코로나19 확산이 진정되면 여행부터 가고 싶다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고 당장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을 찾아가기는 부담스럽다. 그렇다면 여행 내내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오지라면 어떨까.
대한민국의 오지를 꼽자면 경상북도 영양만 한 곳도 없을 것이다. 서울보다 넓은 면적에 인구는 고작 1만 6,000명 남짓. 섬인 울릉도를 제외하면 육지에서는 인구가 가장 적은 곳이다. 그마저도 매년 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들어 인구 소멸 위험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손꼽힐 정도다.
그 영양에서도 수비면 죽파리는 첩첩산중 오지 산골 마을이다. 지난 2011년 영양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가 주민들의 반발과 생태계 훼손 우려 등으로 댐 건설이 백지화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곳이다. 최근 이곳에 자작나무 숲을 중심으로 산림 관광단지가 조성됐다고 해 서둘러 찾아갔다. 사람의 손길이 닿기 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최종 목적지는 ‘죽파리 자작나무 숲’이다. 사실 이곳은 사람이 만든 인공 숲이다. 산림청이 1993년 죽파리 검마산(해발 1,017m) 일대에 나무를 심기 시작해 지금은 평균 수고 20m에 달하는 자작나무 수만 그루가 30.6㏊(헥타르)에 달하는 숲을 가득 메우고 있다. 국내 자작나무 숲을 대표하는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의 3배에 달한다고 하니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동안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다가 인근 검마산 자연 휴양림을 찾은 여행객들을 통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작나무 숲은 청정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접근부터 만만치 않다. 차를 타고 어렵게 영양에 도착했다면 죽파리 가는 길이 이제부터 시작된다. 영양에서 울진 평해로 이어지는 88번 국도를 따라가다 면 소재지인 발리리에서 917번 지방도를 갈아타면 영양의 거의 끝자락이 죽파리다. 도로 양옆을 번갈아 흐르는 천을 따라 구불구불 한참을 들어가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죽파리는 검마산 아래 4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산골 마을로 조선 시대 보부상들이 정착해 마을을 개척했는데 언덕에 대나무가 많다고 해 죽파(竹坡)라 불렀다고 한다.
자작나무 숲은 드문드문 인가가 있는 마을과는 한참 동떨어진 곳에 있다. 죽파리 마을회관을 지나 여러 갈림길을 모험하듯 선택해 도달한 곳에 차단막이 차량 진입을 막고 서 있다. 여기서부터는 차를 세워두고 도보로만 들어갈 수 있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세 갈래 길이 나오고 ‘자작나무 숲길’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목적지까지는 3.2㎞. 성인 걸음으로 천천히 가도 1시간이면 도달하는 거리다. 이곳이 얼마나 오지인지는 산길에 발을 내디디면서부터 먹통이 된 휴대폰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단 걷기 시작했다면 다시 빠져나올 때까지 문자 한 통 오지 않으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오랜만에 오롯이 자유의 시간을 만끽하게 되는 셈이다.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임도는 거의 경사가 없는 완만한 평지 구간으로만 이뤄져 있다. 길은 좁은 등산로가 아니라 차도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고 완만하다. 원래는 차량 통행이 가능했지만 산림 보호 차원에서 올해 여름부터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검마산 자락은 자연 생태계의 보고다. 목적지까지 지루할 것만 같던 산길은 들어서면서부터 청정 자연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다람쥐와 멧토끼·고라니 같은 야생동물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고 수령이 족히 백 년은 됐음 직한 금강송 등 아름드리나무가 곳곳에 널려 있다. 그 옆으로는 계곡이 흘러 걷는 내내 잠시도 지루한 틈이 없을 만큼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등에 땀이 나기 시작할 때쯤 황갈색 숲 사이로 새하얀 목피를 두른 곧은 나무 수백 그루가 저 멀리 눈에 들어온다. 여행의 목적지인 자작나무 숲이다. 꽁꽁 얼어버린 계곡을 건너가니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자작나무 군락이 눈앞에 펼쳐진다. 빽빽하게 꽉 들어찬 자작나무로 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2㎞나 펼쳐지는데 검마산 정상 부근까지 연결된다. 오솔길을 다 걸으면 주차장부터 총 5.2㎞나 되는 거리지만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고즈넉한 숲길을 걷다 보면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너럭바위를 기점으로 원점 회귀하거나 임도를 따라 정상 자락에 있는 자연 휴양림까지 올라갈 수도 있고 자작나무 숲 한가운데 앉아 피톤치드를 마음껏 마시며 여유를 즐기다 오는 것도 좋다. 피톤치드를 내뿜는 자작나무 사이를 천천히 걷다 보니 기분 탓인가 부쩍 건강해진 느낌이 든다.
영양군과 경상북도는 지난해부터 자작나무 숲을 중심으로 수비면 일대를 산림 관광단지로 조성하고 ‘영양자작도(島)’라는 이름을 붙였다. 육지이지만 마치 섬처럼 동떨어진 영양군의 청정 자연의 이미지를 담은 이름이다. 자작나무 숲길은 봄철(2월 1일~5월 15일)과 가을철(11월 1일~12월 15일)에 일 년에 두 차례 입산이 통제된다. /글·사진(영양)=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