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이 4일 국립현충원을 찾아 방명록에 ‘조국에 헌신하신 선열의 뜻을 받들어 바른 검찰을 만들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국민과 함께’라는 문구가 없는 것 외에는 지난해 1월 2일 현충원 방명록과 똑같다. 올해는 왜 ‘국민’이 빠졌을까. 그 내막은 알 수 없고 그저 윤 총장을 향한 정치적 시선에 부담이 컸을 것이라는 호사가들의 짐작이 있을 뿐이다.
‘국민’이 빠진 방명록을 쓴 날 윤 총장의 대권 주자 선호도는 압도적 선두를 달렸다. 리얼미터가 YTN 의뢰로 1~2일 차기 대선 주자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윤 총장이 30.4%로 이재명 경기지사(20.3%)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15%)를 멀찍이 따돌린 것이다. 한 달가량 전인 지난해 11월 23~27일의 같은 조사에서 윤 총장에 대한 선호도가 19.8%로 이 대표(20.6%), 이 지사(19.4%)와 초접전이었음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다. 대세몰이가 시작된 것인가.
‘윤석열 대세’는 문재인 대통령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합작이다. 검찰 개혁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권력을 향하는 수사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훼방을 놓다가 급기야 윤 총장 몰아내기까지 무리하게 밀고 나갔다. 과거 노무현 정부 때도 검찰 개혁을 강하게 추진했지만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송광수 검찰총장 체제에서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의 거침없는 불법 대선 자금 수사로 검찰청에 꽃다발이 쇄도하는 등 검찰에 대한 인기가 치솟아도 반감을 드러내는 대신 제대로 된 수사를 하도록 지켜줬다. 왼팔(안희정 전 충남지사)과 오른팔(이광재 민주당 의원)을 직격해도 노 전 대통령은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검찰총장을 찍어내려 하지도 않았다. 송 전 총장과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사이에 인사 문제 등의 갈등이 노출됐을 때 노 전 대통령은 파국적 상황이 오기 전에 강 전 장관을 교체하고 송 전 총장의 임기는 끝까지 보장했다. 그 덕에 노무현 정부는 검찰에 대한 공정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문 대통령은 달랐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해서는 “마음의 빚을 크게 졌다”며 사감을 드러냈고 추 장관의 윤 총장 몰아내기를 끝까지 좌시하다 파국을 자초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견고하던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는 30%대로 내려앉았고 올해 4·7 보궐선거와 내년 대선에서 정권 심판을 위해 야당을 찍겠다는 유권자가 크게 늘었다. 야당도 웃을 처지가 아니다. 야당 지지율이 높아지면 뭐 하나, 정작 대세는 현직 검찰총장에 쏠려 있지 않은가. 게다가 서울시장 후보까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압도적인 선두다. 집권당의 거듭된 실정에 실망한 국민에게 제1야당이 대안의 리더십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윤석열 현상’에는 야당의 정치적 무능 탓도 분명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지난 1992년에 ‘마니 풀리테(Mani pulite·깨끗한 손)’를 주도한 피에트로 검사가 정치 부패를 일소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었다. 2016년 브라질에서는 ‘세차 작전(Operation Car Wash)’으로 수많은 선출직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를 구속시킨 세르지우 모루 검사가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최악의 정치인으로 꼽히는 베를루스코니의 집권으로 의미가 퇴색됐고 브라질은 우익 포퓰리스트 보우소나루의 대통령 당선으로 귀결됐다. 이런 식의 결말을 우리가 보아서는 안 되겠다. 윤 총장에게로 모인 국민 다수의 올바른 정치를 향한 열망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킬 길을 찾아내야 한다.
1년 전 요맘때 윤 총장의 대선 주자 지지율은 2%대였다. 그때 방명록에 적었던 ‘국민’이 올해 빠진 것이 만에 하나라도 높아진 지지율 탓이라면 상식적이지 않다. 오직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만이 검찰총장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과 여당은 권력을 향한 검찰의 중립적 수사를 지켜줘야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인권 옹호라는 개혁의 명분까지 지킬 수 있다. 검사는 수사를 잘하고 정치인은 정치를 잘해야 국민이 편하다. 나랏일을 맡은 모든 이들이 국민이 준 자기 일에 충실하며 신축년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hns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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