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오후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연극 연출가 장진이 무대에 올랐다. 자신이 작·연출을 맡은 연극의 5년 만의 재연을 앞두고 열린 언론 시연회 자리였다. “연출이 작품 전에 나오는 게 필요하지는 않지만…”이라고 운을 뗀 그는 “힘든 1년을 보내면서 무대를 만들고 관객을 모시는 게 맞는지, 또 잘 할 수 있을지 망설여졌다. 그러나 작품을 만들어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컸다”고 말했다. “배우들도 무척 설레며 기다려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고, 응원해주십시오.”
그의 말마따나 ‘설렘으로 기다려 온’ 배우들은 그 간절함과 갈증을 무대에 원 없이 토해냈다. 팽팽한 긴장 속에 이어가는 심리 싸움과 적절한 시점에 터지는 장진 표 유머, 그리고 허 찌르는 반전까지, 관객과 함께 ‘무형의 존재’를 상대하며 ‘유형의 인물’로 완성해 가는 연극 ‘얼음’이다.
주요 인물은 셋이지만, 배우는 단둘이다.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열여덟 살 소년과 그 소년을 범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형사들. 무대엔 형사 두만과 종률 둘만 등장할 뿐 정작 용의자인 소년 민혁은 보이지 않는다. 형사들이 허공에 대고 말을 걸고 반응하며 조사를 이어가는 동안 관객은 저마다의 상상과 스토리로 ‘18세 살인 용의자 민혁’이란 뼈대 위에 살을 붙여간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존재’는 점점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만큼 두만·종률 두 인물의 열연은 극의 긴장감과 몰입을 끌어가는 일등 공신이다. 극 중 배우들은 경찰서 내 다른 인물로 잠시 변신해 자신이 연기해 온 두만·종률 캐릭터와 대화를 나누기까지 한다. 이런 설정은 민혁의 존재감과 함께 실체와 환영의 경계를 보란 듯이 허물어버린다.
실험적인 무대 연출도 돋보인다. 특별한 기술이나 장치 없이 소품의 위치를 바꿔가며 민혁이 앉은 자리를 후면-왼쪽-오른쪽에서 바라보게 한다. 마치 ‘(당신의) 민혁을 자세히 들여다보라’는 것처럼 말이다.
갈등의 절정을 지나 해소의 단계에 들어설 때쯤 관객은 저마다의 민혁을 완성한다. 그리고 모두가 ‘이것이 사실’이라며 결론을 내리려는 그 때, 예상 못 한 반전이 그 서사를 깨부순다. 단단하고 차가웠던 얼음이 속절없이 녹아내려 무형의 액체로 모습을 바꾸는 순간이다. 지금껏 실체라고 믿어왔던 것은 한낱 환영에 불과했던 것일까. 관객과 그들의 90분을 단숨에 집어삼키는 작품이다. 두만 역에 정웅인·이철민·박호산, 종률 역에 이창용&신성민·김선호가 출연한다. 3월 2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장차·파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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