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노동당 총비서)이 제8차 노동당 대회에서 핵무장력을 대대적으로 과시하는 한편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을 남북관계 회복 조건으로 제시했다. 미국에 대해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최대의 주적”으로 규정하며 적대정책을 철회하라고 경고했다. 정부와 여당은 “북한이 관계개선 의지를 시사했다” “김정은의 답방을 기대한다”며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당장 3월로 예정된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 여부는 최대 고민거리가 될 전망이다. 1년 남짓밖에 남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에 남북관계 진전을 도모하는 게 최우선 국정 과제인 상황에서 북미대화를 위한 바이든 정부의 의중과 전시작전권 전환 계획 등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 당 대회 보고에서 ‘비핵화’ 언급은 빠졌다는 점에서 북한이 협상 목표를 ‘완전한 비핵화’가 아닌 ‘핵능력 축소’로 잡은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그동안 우리 정부가 강조하던 북미 협상의 초점이 바이든 정부 이후 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관련기사> ▶[국정농담] 北과 백신 나누고 금강산 재개발, 보답하라 김정은
이인영 “우주의 기운처럼 한반도 대전환” 기대
당초 우리 정부는 이번 5년 만의 당 대회에서 북한이 남북대화 제안 등의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특히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 4일 영상시무식을 통해 “새해의 첫 달을 맞이하면서 북한의 제8차 당 대회, 미국 대통령 취임 등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둘러싼 정세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가시화 될 예정”이라며 “‘토르’라는 영화를 보면 9개의 세계가 일렬로 정렬할 때 우주의 기운이 강력하게, 또 강대하게 집중되는데, 이것을 ‘컨버전스’라고 한다. 비유하자면 이와 같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집중된 ‘대전환의 시간’이 우리 앞에 열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마침내 기회의 시간이 오고 있다”며 “나는 북한이 우리에 대해 보다 긍정적인 대화·협력의 메시지를 보내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통일부도 앞서 지난달 31일 배포한 당 대회 관련 참고자료에서 “북한이 어려운 대내외 환경을 고려해 전향적으로 입장을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또 미국의 새 행정부를 의식해 ‘온건 기조’의 대외 메시지를 전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지난 1일 노동신문에 연하장 형식으로 게재한 친필 서한 신년사에서 별다른 대남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았다. 그는 “나는 새해에도 우리 인민의 이상과 염원이 꽃필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기 위하여 힘차게 싸울 것”이라며 “위대한 인민을 받드는 충심 일편단심 변함없을 것을 다시금 맹세한다”고 강조했다.
北 당대회 시작은 “경제발전 5개년 목표, 엄청나게 미달”
김정은의 신년사에 대외 메시지가 생략되면서 관심은 북한의 최대 정치행사인 노동당 대회에 집중됐다. 5일 개막한 당 대회에서 김정은은 우선 경제 실패부터 자인했다.
6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정은은 전날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수행 기간이 지난해까지 끝났지만 내세웠던 목표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됐다”고 지적했다. 통신은 김정은이 “새 5개년 계획에 따라 나라의 전반적 경제를 한 계단 추켜세우기 위한 사업을 전개할 것에 대해 언급했다”며 금속·화학·전력·석탄 등 기간공업 부문에 대한 발전 과업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통일부는 이에 대해 “이번 북한의 당 대회가 한반도 평화 및 남북관계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기대를 놓지 않았다.
북한은 당 대회 사흘째까지도 대남 메시지를 내놓지 않았다. 조선중앙통신은 7일 김정은의 당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를 전하면서 “조성된 형세와 변천된 시대적 요구에 맞게 대남 문제를 고찰했으며 대외관계를 전면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우리 당의 총적 방향과 정책적 입장을 천명했다”고 8일 간략히 보도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북한이 과거 남북관계를 ‘북남관계 문제’로 언급한 사례들은 있었으나, ‘대남 문제’라는 표현은 처음인 것으로 보인다”며 “‘대남 문제 고찰’의 구체적 내용이 나오지 않은 만큼 관련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최대 주적”... ‘핵’ 36번 거론한 대외메시지
기다렸던 대외 메시지는 9일에야 드러났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정은은 5∼7일 진행된 당 대회 사업 총화 보고에서 북미 갈등의 핵심 배경인 비핵화는 언급하지 않은 채 ‘핵’을 36차례나 거론했다. 김정은은 “새로운 조미(북미)관계 수립의 열쇠는 미국이 대조선(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는 데 있다”며 “앞으로도 ‘강대강(强對强), 선대선(善對善)’의 원칙에서 미국을 상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미국에서 누가 집권하든 미국이라는 실체와 대조선 정책의 본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며 “대외정치 활동을 우리 혁명 발전의 기본 장애물, 최대의 주적인 미국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지향시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북남관계의 현 실태는 판문점 선언 발표 이전 시기로 되돌아갔다”며 “남조선 당국은 첨단 군사 장비 반입과 미국과의 합동 군사 연습을 중지해야 한다는 우리의 거듭되는 경고를 계속 외면하면서 조선 반도의 평화와 군사적 안정을 보장하는 데 대한 북남 합의 이행에 역행하고 있다”고 압박했다. 그러면서 “남조선 당국의 태도 여하에 따라 다시 3년 전 봄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이인영 장관이 제시한 방역협력, 인도협력, 개별관광은 “비본질적인 문제”라며 무시했다. 금강산 개발도 독자적으로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했다. 통일부는 김정은의 메시지를 두고 당일 곧바로 “남북 합의를 이행하려는 우리의 의지는 확고하다”는 입장을 냈다.
김정은은 이와 함께 “새로운 핵잠수함 설계 연구가 끝나 최종 심사 단계에 있다”며 핵잠수함 도입을 공식화하고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둔 사거리 1만5,000㎞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명중률을 높이라는 주문도 했다. 9일에는 노동당 규약에 ‘조국 통일을 위한 국방력 강화’를 처음으로 명시했다.
김일성·김정일 반열 오른 김정은, ‘독재체제’ 강화하고 SLBM 과시
10일에는 김정은이 노동당 총비서의 직함을 달았다. 당내 공식 직위가 집권 초기 제1비서에서 2016년 위원장으로 한 차례 격상된 뒤 총비서까지 올라간 것이다. 당 총비서는 1966년 2차 당 대표자회에서 신설돼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할 때까지 맡은 직책이다. 할아버지·아버지와 같은 반열에 서며 자신의 시대에 맞춘 ‘유일 영도 체제’를 강화한 셈이다.
각 요직에 김정은 측근들이 약진하며 세대교체를 꾀한 것도 이번 인사의 특징이었다. 김정은의 최측근인 조용원은 최룡해·리병철·김덕훈 등과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돼 단숨에 권력 서열 최상위권에 올랐다. 빨치산 1세대인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의 3남 오일정 당 부장도 당 중앙위 위원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김정은은 당 대회가 마무리된 12일 ‘결론’에서 “핵전쟁 억제력을 보다 강화하면서 최강의 군사력을 키우는데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4일 야간 열병식에서는 신형 추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한판 이스칸데르’ 개량형 등 각종 전략·전술무기를 공개하며 핵무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신형 SLBM ‘북극성-5ㅅ(추정)’은 지난해 10월10일 노동당 창건일 75주년 열병식에 동원한 ‘북극성-4ㅅ’보다 탄두부가 길어져 다탄두 탑재형이거나 사거리 연장형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북한이 당 대회를 기념해 열병식을 개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김정은은 이 자리에서 김일성을 연상케 하는 러시아식 털모자(샤프카)를 쓰고 나타났다. 다만 열병식에서 ICBM은 보이지 않아 김정은이 바이든 정부 출범을 감안해 수위를 조절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조선중앙통신은 15일 “첨단무기들이 ‘핵보유국’으로서의 우리 국가의 지위,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우리 군대의 위력을 확증해줬다”며 “그 이름만 들어도 적대 세력들이 전율하는 당의 믿음직한 ‘핵무장력’인 전략군 종대에 관중들은 환호를 보냈다”고 전했다.
김여정은 예상 깬 직책 강등... 남한에 “특등 머저리”
한편 이번 당 대회에서는 ‘권력 2인자’로 파격 승진이 예상됐던 김여정의 직책은 되레 낮아져 그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은 물론 기존 직책이었던 정치국 후보위원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김여정의 이름은 정치국 후보위원보다 낮은 당 중앙위 위원 명단에만 포함됐다. 이를 두고 대남·대미 업무 성과의 책임을 물은 것이라거나 국제사회 여론을 의식한 조치라는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통일부 당국자는 12일 “김여정의 대남사업 총괄 지위 변동 여부 등 추가 동향에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같은 날 분석 자료를 통해 “김여정이 총괄하는 것으로 알려진 대남·대미사업 부문의 성과 부진에 따른 문책일 수 있으나 언제든 복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대남·국제담당비서직이 폐지됐거나 공석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면서 “김여정이 후계자, 2인자 등으로 거론되는 것이 김정은에게 부담이 됐을 가능성도 있다”며 “젊은 여성이 백두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위직에 오르는 데 대한 간부들과 주민들의 부정적 시선·반발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김여정이 여전히 대남 사업을 총괄하는 지위는 유지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로 김여정은 당 대회에서 당 지도기관인 중앙위원회 위원 139명 가운데 서열 21번째로 호명됐고, 주석단 자리에서도 김정은의 바로 뒤인 두 번째 줄을 개막식부터 폐막식까지 유지했다.
김여정은 12일에도 담화를 내 우리 군을 맹비난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남의 집 경축행사에 대해 군사기관이 나서서 정황포착이니 정밀추적이니 하는 표현을 써가며 적대적 경각심을 표출하는 것은 유독 남조선밖에 없을 것”이라며 “세계적으로 처신머리 골라 할 줄 모르는 데서는 둘째로 가라면 섭섭해할 특등 머저리들”이라고 비난했다.
화상회의 준비하고 답방 기대하지만... 관건은 ‘한미훈련 중단’
우리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일단 북한 입장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우선 문재인 대통령은 11일 신년사에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핵심 동력은 대화와 상생 협력”이라며 “언제든, 어디서든 만나고, 비대면의 방식으로도 대화할 수 있다는 우리의 의지는 변함없다”고 강조했다. 문 재통령의 ‘비대면 대화’ 의지에 통일부는 바로 다음 날인 12일 조달청에 4억원짜리 남북회담 영상회의실 구축 사업을 입찰하는 긴급 공고를 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북한이 호응하면 어떤 방식이든, 언제든 남북 간 대화가 가능하며 우리 정부는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통일부는 또 14일 북측의 대남메시지에 대해 “남북관계 개선 입장을 시사했다”고 분석했다. 이인영 장관도 같은 날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에서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평가하며 각종 교류 준비 사업에 남북협력기금 270억원가량을 지원하기로 했다.
여권에서는 김정은의 답방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설훈 민주당 의원은 11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올해 안으로 김 위원장이 서울에 답방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설 의원은 김정은이 답방을 망설이는 이유로 우리 측의 시위 가능성을 거론하며 “김 위원장은 굉장히 담대하게 넘어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15일 YTN 라디오 ‘황보선의 출발 새아침’에서 김여정 담화를 “과감히 대화하자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김정은의 답방을 거듭 촉구했다.
다만 김정은의 경고 메시지가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에 집중된 만큼 실제 정부의 고심은 깊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이 지적한 군사적 문제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맹을 중시하는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 초부터 북한 측 입장을 수용할 지도 관건이다. 청와대와 정부는 아직 이에 대해 특별한 언급은 없는 상태다.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는 14일 기자회견에서 한국과 미국 정부를 향해 3월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을 요구했다.
북한은 오는 17일 한국의 국회 격인 최고 인민회의를 예상보다 앞당겨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는 김정은이 김일성에 이어 주석 자리까지 오를 지 관심이 쏠린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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