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재보궐선거가 집권 여당의 참패로 끝나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레임덕(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최소한 서울시장 만큼은 접전을 펼칠 것이라는 정부 안팎의 예측이 크게 벗어나면서 임기 후반기 국정동력도 위태로운 상황이 됐다. 전통적 여권 지지자들을 제외한 중도·보수층이 남김 없이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다자 구도였던 지난 대선과 달리 양자 구도에서는 40% 안팎 지지율만으로는 정권 재창출도 힘겹다. 대선 정국을 앞두고 자칫 여당조차 청와대와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청와대가 당장 대대적인 개각과 일부 참모진 교체와 같은 인적쇄신에 나설 것으로 내다본다. 성난 민심을 확인한 만큼 차기 대선까지 여론을 추스를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다. 다만 부동산 정책 등 기존 국정 기조 변화 없이 사람만 바꿔서는 그 효과가 적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자칫 회전문 인사가 나올 경우 쇄신의 효과가 반감될 위험도 있다. 문 대통령은 우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경제 회복, 부동산 부패청산 등 현안을 긴급하게 직접 챙겨 국민 신뢰를 회복하려는 모양새이지만, 특단의 정책 변신이 없는 한 돌아선 중도층을 돌려 세우기는 만만찮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재보선 참패에 여당도 靑 비판…文 레임덕 가속화 위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상시장은 지난 7일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각각 57.50%, 62.67%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뒀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와 김영춘 부산시장 후보는 각각 39.18%, 34.42%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특히 서울 25개 자치구와 부산 16개 자치구가 예외 없이 국민의힘 후보들의 손을 들어줘 충격을 줬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여당에 180석의 의석을 만들어준 민심이 고작 1년 만에 정반대로 돌아선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결과가 여당 후보들 개인의 패배라기보다 문재인 정부 전반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더 짙다고 봤다. 4년 내내 천정부지로 오른 주택비용 문제에 대한 책임론과 부동산 민심에 기름을 부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 정부 여당의 일방통행식 정책 집행,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 이후 악화된 양극화·민생고, 백신 확보 차질, 남북 교착 상태에 따른 외교 성과 부진 등이 주요 패인로 꼽혔다. 검찰과의 갈등이 지루하게 이어지면서 종국에는 국민들 뇌리에 개혁의 명분까지 희미해진 효과도 있었다. 불만이 누적된 상황에서 불거진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 박주민 민주당 의원 등 여권 인사들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논란은 정권 심판에 확실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대선을 1년 앞둔 이번 선거의 후폭풍이 청와대에도 상당히 미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당장 문 대통령의 30%대 지지율이 위협을 받으면서 실무 공직자들의 국정 업무 수행이 이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여기에 이전 정부의 임기 말과 똑같이 여당조차 청와대·정부에 등을 돌릴 경우 레임덕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여당 내에서도 부동산·검찰개혁과 관련한 노선 수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50여 명의 민주당 초선 의원들은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모임에서 “검찰개혁이라는 블랙홀에 빠져 민생에 소홀했다” “청와대에 더는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인사는 하지 말라고 요구해야 한다” “‘당이 사실상 청와대 출장소에 가깝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녔다”는 등의 주장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6월로 예정된 민주당의 대선 경선을 앞두고 유력 주자들이 속속 출마를 공식화할 경우 정계와 관가가 문 대통령이 아닌 차기 대권 주자들을 중심으로 각자도생 하는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文 “국민 질책 엄중, 민생 안정 매진”…정책 실패 인정은 아직
여당의 재보궐선거 이후 청와대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7일 개표 시작 시점을 전후해 예상보다 여당에 판세가 크게 불리한 것으로 파악되자 일부 수석실은 출구조사 방송을 지켜보거나 내부적으로 긴급 대책회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선거 다음 날인 지난 8일 브리핑에서 4·7 재보선과 관련한 문 대통령의 입장이라며 “국민의 질책을 엄중히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더욱 낮은 자세로, 보다 무거운 책임감으로 국정에 임하겠다”며 “코로나 극복, 경제 회복, 민생 안정, 부동산 부패 청산 등 국민의 절실한 요구를 실현하는 데 매진하겠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당장 다음주부터 방역과 민생을 직접 챙기는 행보에 돌입하기로 했다. 강 대변인은 10일 서면 브리핑을 통해 문 대통령이 12일 코로나19 대응 특별방역점검회의와 15일 확대경제장관회의 등 두 개의 긴급 일정을 소화한다고 밝혔다. 백신 수급 계획 등을 포함한 코로나 대응 전략과 주요 전략산업 현황을 직접 챙겨 국민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선거와 직접 연관된 행보는 아니지만, 이호승 청와대 정책실장은 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7일부터 각종 경제단체장과 릴레이 회동에 나섰다. 7일 대한상공회의소와 중소기업중앙회의 최태원·김기문 회장과 면담한 이 실장은 8일에는 한국경영자총협회와 한국중견기업연합회의 손경식·강호갑 회장과 만났다. 오는 14일에는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예방한다. 최근 경제지표 반등에 따라 이를 확실히 안착시키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행보다.
문 대통령은 앞서 지난달 31일 ‘상공의 날’에 처음 참석해 최 회장을 만나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호승 실장 모두 기업인들을 활발히 만나 대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5일 수석보좌관회의에는 이례적으로 강삼권 벤처기업협회 회장, 지성배 한국벤처캐피탈협회 회장을 초청하고 각 부처에 “규제 혁신에 더 속도를 내 경기회복을 촉진하는 데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다만 8일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재보선 참패와 관련해 사의를 표명한 청와대 비서진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현재까지는 없다”고 답했다. 부동산 정책 실패를 인정하거나 기조 변화를 검토하느냐는 물음에도 “대통령 입장을 잘 살펴봐 달라”며 “앞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만 했다. 이호승 실장은 앞서 지난 1일 현 정부 집권 기간에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 것을 두고 “부동산 정책에 대해 국민들께서 많이 실망하고 어려운 분도 있다는 것을 잘 안다”면서도 “그런데 이게 한국적인 현상만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르면 다음주 대대적 개각…인적쇄신으로 돌파구
기존 핵심 정책을 두고 당청 간 엇박자가 날 조짐이 보이면서 청와대는 이르면 다음주 대대적 개각으로 돌파구를 마련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문 대통령이 재보선 직후 정세균 국무총리를 필두로 장관급 5~6명과 청와대 비서진을 일부 교체하는 형태로 국면 전환을 꾀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우선 대권 출마를 기정사실화 한 정세균 국무총리가 공식적으로 사의를 표할 것이라는 게 여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렇다 할 ‘친문’ 유력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현 정부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정 총리의 본격적인 대선 행보는 청와대 입장에서 나쁘지만은 않은 시나리오다.
정 총리의 후임으로는 ‘여성 총리’와 ‘비(非)호남 남성 총리’가 동시에 거론되고 있다. 여성 장관 비율이 10%대로 떨어진데다 이낙연 민주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과 정 총리 모두 호남 인사였기 때문이다.
여성 총리 후보군으로는 5선 의원 출신인 이미경 전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이사장,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김영란 전 대법관, 김영주 민주당 의원,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등이 꼽힌다.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던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보은 인사’ 차원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남성 후보 중에는 경북 출신인 김부겸 전 민주당 의원과 김영주 전 무역협회장 등이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인물난에 빠질 경우 부산 출신인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과 강원 출신인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까지 고려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김상조 전 정책실장을 비롯해 청와대 경제 라인이 최근 모두 바뀐 만큼 홍 부총리도 교체될 가능성이 높다. 홍 부총리 후임으로는 구윤철 국무조정실장, 은성수 금융위원장, 정은보 한미방위비분담협상 대사, 고형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한민국대표부 대사 등이 꼽힌다.
장관급에서는 문 대통령이 지난달 12일 이미 교체를 예고한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퇴진할 것으로 보인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9일 4·7 재보궐 선거 참패 직전까지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 유임을 검토했다는 중앙일보의 언론보도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개각 폭이 커질 경우 재임 기간이 오래된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 문성혁 해양수산부 장관, 김현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등도 교체 대상이 될 수 있다. 지난해 말 ‘대선 역할론’을 언급하며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이인영 통일부 장관도 개각의 변수로 꼽힌다.
‘콘크리트’ 지지층만 남기고 돌아선 민심…정책 전환이 관건
박영선 전 장관이 이번 재보궐선거에서 얻은 득표율 39.18%는 문 대통령이 2017년 대선 당시 서울에서 얻은 42.3%보다 다소 낮았다. 다만 여권에 불리한 판세 때문에 투표 자체를 포기한 여당 지지자들이 일부 있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집토끼’는 그대로 남았다는 평가다.
문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여권만 지지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유권자들이 등을 돌렸다는 점이다. 특히 보수 성향 유권자뿐 아니라 선거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도층까지 빠짐 없이 정권 심판에 동참했다는 점이 문재인 정부에 뼈 아픈 결과로 남았다. 다자 구도로 치러져 40% 남짓으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2017년 대선과 달리 내년 대선은 양자 구도로 치러질 가능성이 상당하다. 현 정부 입장에서는 중도층을 돌려 세울 계기를 마련하는 게 시급한 상황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실패할 경우 곧 대선 정국으로 돌입하는 여당과 유력 대권 주자들 역시 청와대와 더 강하게 선을 그을 공산이 크다.
결국 핵심은 국정기조 전환 여부라는 진단이다. 대폭적인 인적쇄신을 단행한다 해도 현재 하마평에 오르는 인사들은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아주 신선한 사람들이 아니다. 정권 말에는 혁신의 꿈을 안고 공직에 나설 후보군 자체가 작다. 사람을 아무리 바꿔도 국정기조가 똑같다면 부동산 등 각종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학습효과도 국민들에게 각인돼 있다.
보수 정부 9년의 피로도가 쌓였던 2017년과 달리 현 시점에서는 도덕성 우위로만 국정동력을 얻으려는 시도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정권이 교체된 지 벌써 4년이 지난 데다 여권 인사들의 수많은 사건·사고를 겪었기 때문이다. 도덕성 경쟁이 더 이상 큰 변수가 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번 재보선에서도 확인한 바 있다. 오로지 전통적 충성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기는 효과 밖에 없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일단 국정 전반의 기존 기조를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국민들이 180석이나 몰아줬는데 ‘개혁’ 작업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아서 선거에서 졌다’는 판세 분석과 ‘실패한 정책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위선적 태도로 일관해 선거에서 졌다’는 정세 판단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이제 오롯이 문 대통령의 몫으로 남았다.
※‘국정농담(國政濃談)’은 행정·외교안보·정치 관련 ‘농도 짙은’ 현장 이야기와 현안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윤경환 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