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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행위' 퍼포먼스, 미술관으로 들어오다

■ 경기도미술관 기획전 '몸 짓 말'

결과물보다 행위 과정·방식에 초점

작가의 '퍼포먼스' 자체를 사들여

설치매뉴얼따라 종이 찢어붙이고

벗고앉아 명상하는 '도' 현장 재연

경기도미술관 소장품인 이건용의 '신체드로잉 85-2' /조상인기자




경기도미술관 기획전 '몸 짓 말'에 선보인 이건용의 작품 전시 전경. /조상인기자


미술관 전시실 바닥에 검은 종이가 길게 깔렸다. 백발의 노(老)화가가 그 위에 맨발로 쭈그리고 앉았다. 흰색 분필을 집어든 그가 팔을 좌우로 휘둘러 선을 긋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분필로 그어진 선이 발길에 지워지며 독특한 형태를 남긴다. 약 20분의 퍼포먼스가 끝나고 관객들이 떠나자 전시를 맡은 최혜경 학예연구사가 종이 위로 분사형 고정액을 뿌린다. 분필 그림에서 더 이상 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일시적 행위를 예술적 흔적으로 간직한 작가 이건용(79)의 작품 ‘달팽이 걸음’이 완성된 순간이다. 지난달 31일 경기도 안산시 경기도미술관에서 이렇게 즉석 제작된 이 작품은 오는 6월 27일까지 계속되는 미술관 교육프로젝트 기획전 ‘몸 짓 말’에서 전시기간 내내 선보일 예정이다.

이건용 작가가 지난 3월31일 경기도미술관에서 현장 퍼포먼스로 선보인 '달팽이걸음'. 작품 아래에 작가 서명과 함께 장소가 적혀있다. /조상인기자


일시적이고 곧 없어질 ‘퍼포먼스’가 미술관에 들어왔다. 현대미술에서 ‘퍼포먼스’는 행위의 시간적 과정을 중시한다. 결과물보다 과정과 개념, 방식에 주목해야 하는 작품이다. 이건용 작가의 경우 1976년부터 자신의 몸을 이용한 행위의 궤적을 담은 ‘신체드로잉’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된 ‘신체드로잉 85-2’는 캔버스를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라 캔버스에 등을 댄 채 붓을 쥔 손목을 뒤로 꺾어 팔 닿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린 작품이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흡사 추상표현주의 같지만, 실제 내용은 인체의 한계, 행위와 화면의 관계를 이지적으로 탐구한 작품이다. ‘달팽이 걸음’은 197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처음 발표한 그의 대표작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건용은 “행위미술은 공연하고 보여주는 게 아니라 오늘, 여기 있는 사람과 개념·상황을 공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미술관 기획전 '몸 짓 말'에 선보인 홍명섭의 '면벽'. 1978년릐 퍼포먼스를 작가 매뉴얼에 맞춰 다시 제작한 작품이다.


경기도미술관 기획전 '몸 짓 말'에 선보인 홍명섭의 '면벽'. 1978년릐 퍼포먼스를 작가 매뉴얼에 맞춰 다시 제작한 작품이다. /사진제공=경기도미술관


전시장 벽면에 찢긴 종이 모서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있다. 홍명섭(73)의 ‘면벽’이다. 자칫 작품인 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인 이 작품은 홍 작가가 1978년 대전문화원 화랑의 ‘면벽’ 전시 때 선보인 퍼포먼스 작품으로, 경기도미술관 소장품이다. 당시 현장에서 작가가 찢어 붙인 종이와 벽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미술관은 40여 년 전의 종이와 벽이 아닌, 작가가 손수 적은 ‘설치매뉴얼’을 2019년 소장품으로 구입했고 이번 전시에 내놓았다. 국내 미술관이 퍼포먼스 현장을 촬영한 사진 등의 기록물을 소장한 사례는 있으나 퍼포먼스 자체를 구입한 것은 처음이었다. 안미희 경기도미술관장은 “퍼포먼스 개념을 적은 매뉴얼을 소장했다는 것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몸’을 도구 삼아 ‘짓’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표현과 생각을 수집하는 것이라 의미있다”면서 “개념 정리가 명확할 것, 3~5개 수준의 에디션 관리가 가능할 것 등의 기준을 만들고 사례를 연구해가며 수집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능경의 1976년작 '신문읽기' 퍼포먼스의 당시 모습. /사진제공=경기도미술관




성능경(77) 작가는 1970년대 유신정권이 검열하고 억압한 신문을 재료 삼아 신문을 읽고 기사를 도려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신문을 오려내고, 매일 오려낸 신문으로 영어공부를 하는 수행적 작업도 이어간다. 권력에 저항하는 동시에 일상에 주목하는 성 작가의 1976년작 ‘신문읽기’ 퍼포먼스도 미술관 소장품이다.

김구림의 1970년작 퍼포먼스 '도(道)' /사진제공=경기도미술관


김구림의 퍼포먼스 작품 '도(道)'를 위한 설치 전경. 오는 5월19일 김구림 작가의 퍼포먼스가 예정돼 있으며, 관람객도 나무 좌대에 앉아 작품을 체험할 수 있다.


또 다른 전시실에는 넓게 깔린 흰 광목천 위에 지름 70㎝의 나무둥치가 올려져 있다. 김구림(85)은 1970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인 경복궁 전시실에 이 같은 좌대를 설치하고는 벌거벗은 채 가부좌를 틀고 그 위에 앉아 명상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작품명은 ‘도(道·Zen)’. 사각의 흰 천은 땅, 둥근 통나무는 하늘을 상징하며 음양사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김 작가는 5월 19일 미술관에서 현장 퍼포먼스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재이 '백조'. 목욕탕 타일벽에 그려진 허상의 세계와 이상향의 괴리를 꼬집으며 목욕탕 퍼포먼스를 펼친 작가의 영상작업 중 일부다. /사진제공=경기도미술관


197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는 ‘아방가르드’ ‘실험미술’이라 불린 퍼포먼스와 행위예술이 성행했고, 이는 훗날 다양한 개념미술로 확대됐다. 이번 전시에는 원로작가들 외에 김범의 ‘노란비명 그리기’, 안규철의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읽기’, 목욕탕시리즈로 유명한 이재이의 ‘백조’ 등 12명 작가의 작품 103점, 관련자료 71점이 선보였다. 이 중 김구림,성능경,이건용 등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기획해 내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릴 예정인 ‘아방가르드: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전을 앞두고 있다. ‘퍼포먼스 아트’가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한 정체성 중 하나로 소개될 예정인 만큼 이번 전시의 의미가 남다르다. /글·사진(안산)=조상인기자

장지아의 '작가를 위한 신체적 조건-모든 상황을 즐겨라' 영상 작업 중 한 장면. 작품 속 등장인물이 작가 자신이다. /사진제공=경기도미술관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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