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둘러싼 ‘자국 우선주의’ 현상을 지적하며 또다시 미국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정치 평론가들은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을 두고 청와대가 백신 수급과 관련한 정부 책임론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석했다. 또 최근 백신 수급 논란을 미국 등 외부로만 돌리는 것은 다음 달 개최될 예정인 한미정상회담이나 국제 백신 협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26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은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이 필요한데도 국제정치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여유가 있을 때는 모든 나라가 한목소리로 연대와 협력을 말했지만 자국의 사정이 급해지자 연합도, 국제 공조도 모두 뒷전이 돼 국경 봉쇄와 백신 수출 통제, 사재기 등으로 각자도생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을 추구하면서도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우리도 내부적으로 단합해 지혜롭게 대응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이날 특정 국가를 명시해 자국 우선주의를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정치권에서는 다분히 미국을 겨냥한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백신을 개발한 나라 자체가 몇 안 되는데다 미국은 백신 수출 통제, 무차별적인 사재기 등을 단행한 대표 국가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일 중국 하이난성에서 열린 보아오포럼 개막식 영상 메시지에서도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거론하고는 “당장에는 자국 경제를 지키는 담이 될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세계경제의 회복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것”이라며 미국을 겨냥한 듯한 주장을 내놓았다. 문 대통령은 당시 “개발도상국에 대한 백신 기부와 같은 다양한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국 정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며 반대로 중국을 치켜세웠다. 문 대통령은 앞서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018년 싱가포르 합의를 폐기하는 것은 실수가 될 것”이라면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실제적이고 불가역적인 진전을 이룬 역사적인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고 압박했다.
문 대통령이 이날 다시 한 번 백신 자국 이기주의를 비판한 것은 백신 수급과 관련한 정부 책임론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된다. 야당은 물론 여권의 일부 유력 인사들까지 문제 제기를 하면서 국민적 불안감이 높아지자 정부의 노력을 강조하는 내부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자신이 국민에게 약속한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남을 탓하는 것”이라며 “외교는 실리를 갖고 하는 것인데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할 플랜도 없이 비판을 피하려고 규범적 이야기만 내놓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영국 등 선진국의 자국 우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도 아닌 문 대통령이 백신의 보편적 배급을 문제 삼는다고 해서 백신 공조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한편 백신 수급과 관련해 27일 오후 3시 청와대에서 스탠리 에르크 노바백스사 최고경영자(CEO)를 접견하기로 했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은 접견 자리에서 우리나라와 노바백스사와의 백신 생산 협력 관계 확대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신속한 인허가 신청 등 국내 도입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윤경환 기자 ykh22@sedaily.com, 김혜린 기자 r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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