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은 고성 내륙 여행에서 빼놓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북방식 전통 한옥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수백 년간의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곡마을의 행정구역상 명칭은 고성군 죽왕면 오봉1리다. 오음산과 두백산·공모산·순방산·제공산·호근산까지 5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때문에 해변까지 불과 1.5㎞ 거리임에도 어촌이 아닌 전형적인 산골 마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왕곡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로 여겨진다. 분지 형태의 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배 모양으로 수백 년간 전란과 화마를 모두 피해갔다. 6·25전쟁뿐 아니라 지난 1996년·2019년 고성 산불 때도 왕곡마을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의 역사는 14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건국에 반대한 고려 충신 함부열이 간성(고성의 옛 지명)으로 낙향했고 그의 손자 함영근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조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곳을 복구하면서 5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을 이뤘다. 북방식 전통 한옥과 초가집 50여 채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2001년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35호로 지정됐다.
속초에서 고성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를 타고 가다 송지호로를 갈아타면 왕곡마을로 연결된다. 개울을 따라 전통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골 마을의 풍경이 펼쳐진다. 마을 위쪽에서는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했다는 양근 함씨 4세 효자각과 함정균 가옥 등 함씨 후손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19세기 전후로 지어진 20여 채의 가옥들은 추운 산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북방식 전통 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굴뚝마다 진흙과 기와를 쌓고 제일 위에 항아리를 엎어놓았는데 굴뚝을 통해 나오는 불길이 초가에 옮겨붙지 않도록 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50여 가구 중 나머지 30여 채는 짚과 흙·돌로 세워진 전통 초가집이다. 다른 민속 마을처럼 현대에 복원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백 년간 대를 이어 살아가는 집들이다. 1900년대 초 시골 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덕분에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을 그린 영화 ‘동주’가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왕곡마을은 온 가족 여행지다. 북방식 전통 가옥에 머물며 별자리 관측과 전통문화 체험을 할 수 있다. 마을 주변에는 송지호해변과 송지호관망타워·공현진항 등 볼거리가 가득하다. 넓고 화려한 양반집 고택이나 정자·누각은 볼 수 없지만 다른 민속 마을과 달리 꾸밈없는 있는 그대로의 옛 전통 마을의 풍경을 만나볼 수 있다.
/글·사진(고성)=최성욱 기자 secre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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