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수평선과 일렁이는 구름, 생명이 꿈틀대는 흙과 그 속에서 돋아나 춤추는 나무들. 구체적이지 않으나 친숙하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이나 어디서 본듯한 풍경.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조선 초기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 같은 몽환적 사실성이 느껴진다. 땅과 하늘이 뒤섞이더니, 실경과 환상이 공존한다. 전통 옻칠을 현대 회화에 접목하는 작가 채림(58)의 ‘대지(The Good Earth)’ 연작을 비롯해 지난 2019년부터 ‘아리랑 칸타빌레’라는 이름으로 전개 중인 제주·여수·통영 등 우리나라 곳곳의 풍경들이다.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13일 막을 내린 개인전 ‘옻, 삶의 한가운데’에서 작가는 이들을 포함해 최근 작업한 옻칠 회화 144점을 선보였다.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후 보석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치던 작가는 보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우리 전통에 관심을 가졌다가 옻칠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지난 2014년부터 옻칠 그 자체를 빛나게 하기 위해 자개와 보석을 박은 ‘옻칠 회화’를 시작했다. 전업 작가로 활동하면서 산과 들, 풀꽃을 들여다보던 시선이 좀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조망하기 시작했고, 최근작에서는 꿈 속의 이상향이 현실의 사실감과 절묘하게 교차하며 형태와 색을 분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전시는 특히 자유자재로 놀리기 시작한 색의 감각이 두드러진다. 실체 옻 유액은 검은 빛인데, 작가는 여기에 자신이 연구한 안료를 섞어 기존 옻칠 회화에 없던 다양한 색을 시도했다.
채림의 작업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옻나무 수액 자체가 나무를 10년 키워 겨우 200g 남짓 얻어낼 수 있는 귀한 재료다. 옻이 오르는 고생은 말할 나위 없으며, 점성이 높아 다루기 어렵고 온도와 습도에도 민감해 오래 공을 들여야 한다. 작업을 위해 나무판을 삼베로 감싼 후 옻칠하고 한지 바르기를 거듭한다. 바탕화면을 만드는 데만 30~40번 씩 옻칠 하고 말려 덧칠하는 연마과정을 거친다. 1,000년 간다는 한지와 썩지 않는 옻을 통해 작가가 담고 싶은 것은 영원성이다. 사람들이 보석을 통해 얻고자 했던 귀한 가치, 유한한 인생이 동경할 수밖에 없는 예술의 고귀함이 바로 그 영원성 아니던가.
전통을 연구한 끝에 작가는 옻칠 기법인 ‘지태칠(紙胎漆)’을 변형해 작업에 도입했다. 종이 위에 옻칠을 더하는 것이 ‘지태칠’인데, 구김없이 매끈하게 펼치는 것을 강조한 전통방식과 달리 작가는 자글자글한 주름을 자연미로 끌어들였고 과감한 색채를 도입해 현대적 미감을 시도했다. 야들야들한 종이와 끈적이는 옻칠을 밀고 두드리고, 찢고 부스러뜨리기까지 하니, 작업이 고된 수행과 다를 바 없다.
옻칠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간이 머금은 수분의 양에 따라 색이 변화한다. 처음에는 검정에 가깝게 어둡던 옻색이 온도와 습도에 맞춰 환하게 바뀌는 과정을 두고 작가는 “옻이 피어난다”고 말했다. 작가가 불어넣은 숨결과 땀방울, 이후 소장가의 애정까지 인간의 영향도 작품의 색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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