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파크와 더불어 뉴욕의 도심 속 정원을 대표하는 ‘뉴욕 보태니컬 가든’이 물방울 무늬의 점들로 뒤덮였다. 뉴욕 맨해튼 북쪽 브롱크스 지역의 30만 평의 넓은 토지에 1,000만 종의 다양한 식물을 품고 있는 이 거대한 식물원에서 지난 4월부터 야요이 쿠사마의 전시가 한창이다. ‘쿠사마:우주의 무한함(Kusama: Cosmic Infinity)’라는 제목으로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근 작업까지 드로잉, 페인팅,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고 있다.
쿠사마는 검정과 노란색 물방울 무늬 호박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다.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 호박 조각을 볼 수 있으며, 제주 본태박물관에서는 무한의 거울방 설치 작품을 경험할 수 있다. 일본 태생의 쿠사마는 27살이 되던 해에 여성에게 관대하지 못한 좁은 일본을 떠나 기회의 땅 미국으로 향했다. 평소 존경하던 작가 조지아 오키프의 조언이 이주를 결심하게 했건만, 1958~73년 그 시기 뉴욕 미술판 또한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잭슨 폴록, 윌리엄 드쿠닝, 프랭크 스텔라 등 백인 남성 작가 위주의 추상표현주의가 성행하던 시기였다. 쿠사마는 동양인이자 여성으로서 큰 소외감을 경험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파격적인 누드 퍼포먼스를 비롯해 자신의 몸에 물방울 무늬 점 스티커를 붙이고 거리를 활보하는 등 적극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뉴욕에서 겪은 지속적인 외로움과 소외감은 작가를 정신적으로 병들게 했고, 결국 쿠사마는 일본으로 돌아가게 됐다.
일본에서 쿠사마는 정신병원의 치료를 받으며, 작업실을 출퇴근하면서 작업 활동을 이어갔다. 물방울 무늬 점 또는 동일한 개체 같은 ‘지속적 형태의 반복’은 작가에게 정신적 치유의 의미, 영원한 시간과 절대적인 공간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작품활동이 유일한 생명 수단과 다름이 없다는 작가는, 예술이 없었으면 이미 자신의 손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중앙 분수대를 향하는 중앙 통로 옆의 거대한 나무들이 쿠사마의 시그니처인 물방울 무늬 천으로 싸여 있다. 중앙 분수대에는 태양을 형상화한 거대한 조각이 관람객들을 맞는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자연 속에 놓인 쿠사마의 작업들이 관객들과 능동적으로 교감하는 기회를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화이트 큐브와 같은 실내 공간과 달리 뉴욕 보태니컬 가든에 전시된 유기적 형태의 쿠사마 작품들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롭게 어울린다. 또한 야외에 설치된 쿠사마의 조각 작품들 표면은 반사되는 유광 재질로 마감돼 주변 환경이 고스란히 담긴다. 각 작품 표면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풍경들이 반사되고, 관람객들 또한 작품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 작품이 ‘나르시스 정원(Narcissus Garden)’이다. 1966년에 처음 전시된 이 작업은 이후 다양한 지역에서 재현됐다. 수백 개의 거울 구슬들로 이루어진 작품이 식물원 내 연못 위에 띄워졌다.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 수백 개의 구슬들이 무리 지어 연못에서 움직이는 장면은 장관이다. 거울 처리가 된 각 구슬들 표면에는 연못 주변 풀밭과 하늘이 반사된다. 관람객 가까이 있는 구슬 표면에는 자연과 더불어 인체의 형상까지도 담긴다. 이렇게 각 구슬에서 반사되는 주변 환경의 이미지들은 기존 연못과 조화롭게 어울리며 쿠사마만의 또 다른 연못을 만든다.
꽃 조각 작품 ‘My Soul Blooms Forever’ ‘Hymn of Life-Tulips’ 등이 실내 온실과 야외 분수대에 설치돼 있다. 물 위에 놓인 각기 다른 색의 꽃 조각들은 초현실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물 표면에 반사된 꽃의 이미지는 실제 작품과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루며 상하로 새로운 풍경을 창출한다. 바람이 만든 물의 파동으로 물 표면의 꽃 이미지가 흔들리며 실재하는 꽃 조각들과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현재 야요이 쿠사마는 런던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 뉴욕의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도쿄의 오타 파인아트 갤러리를 중심으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달에는 위의 세 갤러리가 공동으로 쿠사마가 2009년부터 시작한 ‘나의 영원한 영혼(My Eternal Soul)’ 시리즈를 선보인다. 6월 4일 런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가 먼저 막을 올렸고, 17일 뉴욕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18일 도쿄 오타 파인아트가 연달아 전시를 연다. 쿠사마의 선풍적인 인기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글·사진(뉴욕)=엄태근 아트컨설턴트
※필자 엄태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뉴욕 크리스티 에듀케이션에서 아트비즈니스 석사를 마친 후 경매회사 크리스티 뉴욕에서 근무했다. 현지 갤러리에서 미술 현장을 경험하며 뉴욕이 터전이 되었기에 여전히 그곳 미술계에서 일하고 있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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