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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점령군’ 운운하며 역사에 부당 개입…자학적 역사관 버려야” [청론직설]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광복 당시 일본군 34만, ‘해방’ 위해 미군 ‘점령’ 불가피

이념 갈등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우월성만 인정하면 해결

文정부, 北과 中에 지나친 저자세, 국민 자존심 고려해야

내년 대선, 편 가르기 정치인보다 통합의 리더 나왔으면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가 26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정치권이 ‘점령군’ 운운하며 현대사에 개입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만 인정하면 이념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형주기자




올해로 광복 76돌, 대한민국 정부 수립 73돌을 맞았지만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은 여전히 크다. 해방 직후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이자 한국정치학회장을 지낸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는 26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선택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하면 자연히 풀릴 문제”라고 강조했다. 특히 해방 직후 한반도 주둔 미군의 성격을 둘러싼 여야 정치권의 논란에 대해 “정치권이 ‘점령군’ 또는 ‘해방군’ 운운하며 현대사에 개입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고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는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면서 “이제 와서 출범 당시의 문제에 얽매여 자기 비하를 하거나 자학적인 사관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북한과 중국에 너무 저자세인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뒤 “내년 대선에서는 편 가르기보다는 국민 통합에 더 유능한 정치인이 선택받았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피력했다.



-우리 사회의 이념적 분열이 여전히 깊은데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대한민국이 선택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면 해방 직후 역사를 둘러싼 이념 갈등은 자연히 풀릴 것이다. 지난 1948년 이후 남북이 걸어온 길을 비교해보면 남한은 정부에 잘못이 있을 경우 국민들이 이를 수정하고 지도자를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체제를 택했다. 반면 북한은 주민이 정부의 잘못을 수정하거나 지도자를 바꾸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경직된 체제를 선택했다.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우리 내부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여권의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가 최근 ‘대한민국이 친일 청산을 못 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했다’고 말해 논란을 낳았는데.

△미군은 일제 식민 통치기에 복무했던 관료와 경찰 조직을 활용해 군정을 실시했는데 이들 조직 전체를 친일 세력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지나치다. 한민당 인사가 미군정과 협력 관계를 맺었는데 이 가운데 일부는 일제시대 경력이 불분명한 인사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인사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들 전체를 친일 세력으로 매도하는 것은 무리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한국 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이양받았기 때문에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 체제를 유지했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나라가 깨끗하게 출발하지 못했다’는 이 지사의 발언에 대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했다는 비판이 있다.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5·10 선거에 불참하거나 반대한 정치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 있는 출발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은 5·10 선거에는 불참했지만 대부분 2년 후 치러진 5·30 선거에는 참여했다. 따라서 출발 당시 부분적 결점이 있다는 것을 빌미로 정통성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흔드는 것은 자기 비하 아닌가.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고, 유일하게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발전했다. 이제 와서 출범 당시 문제에 얽매여 자기 비하를 하거나 자학적인 사관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표현까지 했는데.

△동의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미군이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발표한 포고문 한 장만 갖고 이들 주둔군의 성격을 논한다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처사다.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가 26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정치권이 ‘점령군’ 운운하며 현대사에 개입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고 말하고 있다. /성형주기자


-실제로 해방 전후사는 어떻게 전개됐는가.

△1943년 11월에 모인 미국·영국·중국의 대표가 발표한 카이로선언은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있음을 확인하고 적당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를 수립할 것을 약속한 것이었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야 했으므로 연합군이 한반도를 물리적으로 점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반도는 일본이 주권을 행사하는 일본의 식민지였다. 한민족을 대표하는 어떠한 정치 집단도, 무장 단체도 없었고, 어느 누구도 방대한 규모의 일본군과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45년 8월 당시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이 그렇게 많았나.

△남한에 23만여 명, 북한에 11만 7,000명, 총 34만 7,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반면 소규모의 지하활동만 존재했던 한민족으로서는 자력으로 민족 해방을 쟁취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로지 조선총독부라고 하는 일본의 식민 통치기관만 있었을 뿐이다.

-1945년 해방 정국을 둘러싸고 진보 진영에서 당시 좌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비해 지나치게 우파를 폄훼한다는 지적이 있다.

△중국의 항우와 유방 사례에서 보듯이 역사에서는 승리한 쪽보다는 패배한 쪽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갖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 해방 전후사와 6·25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이 소개될 무렵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지만 그 뒤 소련이나 중국의 자료가 발굴되고 소개돼 현대사에 대한 일방적인 미화나 폄훼 현상은 많이 줄어들었다. 정치권이 현대사 해석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학술적 차원의 일방적 미화나 폄훼는 저절로 줄어들 것으로 본다.

-현시점에서 70여 년 전의 일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소모적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소모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안타깝게도 분단 상태가 지속되는 한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출범 자체를 부정하는 체제가 휴전선 이북에 존재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논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가 26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정치권이 ‘점령군’ 운운하며 현대사에 개입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고 말하고 있다. /성형주기자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연구자로서 해방 정국에 대해 아쉬움이 있다면.

△당시 김규식과 여운형이 주도한 좌우합작 운동이 있었다. 극좌와 극우를 배제하고 중도적인 세력을 규합하려는 이들의 운동이 결실을 거뒀더라면 한국 현대사의 흐름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두 사람의 암살로 좌절됐다. 이러한 성격의 좌우합작 운동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승만 전 대통령은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것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잘못된 정치를 스스로 수정해나갈 수 있는 정치제도를 도입했다. 바로 이로 인해 그 자신이 권좌에서 쫓겨나지 않았나. 그 덕분에 그 뒤 다른 대통령들도 잘못할 경우 비판과 탄핵의 대상이 되는 체제가 정착될 수 있었다. 이처럼 자기 보완과 수정이 가능한 체제를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이 전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논란도 계속 이어지는데.

△3선 개헌과 유신으로 장기 집권을 도모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나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제3세계 국가들에서 경제 발전을 구실로 독재를 한 정치 지도자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우리만큼 눈부신 발전을 이룬 나라는 없다. 당시 야당이 필요 없다고 했던 포항제철과 고속도로 등을 건설해 경제 발전에 기여한 측면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이 끝난 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시대의 소명을 잘 수행한 대통령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시대적 소명을 완수하려고 하지 않은 대통령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굳이 꼽자면 과도기에 주어진 소명을 나름대로 수행했다는 의미에서 냉전 해체기의 역할에 충실한 노태우 전 대통령, 문민정부로의 전환에 큰 역할을 한 김영삼 전 대통령, 국민과 함께 경제 위기를 극복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가 26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정치권이 ‘점령군’ 운운하며 현대사에 개입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고 말하고 있다. /성형주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시대적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

△남북 평화 프로세스를 소명으로 삼고 추진했지만 너무 조급했다. 지금 남북 관계는 파탄 난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과 중국에 너무 저자세를 보이고 일본에는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게 문제다. 북한이 ‘삶은 소대가리’라고 욕을 하는데도 그것을 대화의 신호라고 받아들이는 정도이니 너무 심각하지 않은가. 대한민국 국민의 자존심도 고려하면서 남북 관계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국가 지도자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치 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각 분야에서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울러 국민 화합과 국가 발전에 대한 장기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춰야 한다.

-시대별 정당 구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준 학자로서 지금의 정당 구도를 평가한다면.

△아무리 정권 획득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치권에서 통합과 분열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정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본다. 장기적 관점에서 유권자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안과 정책·비전을 제시해야지 선거를 앞두고 헤쳐 모이는 식의 풍토는 지양돼야 한다.

-내년 3월 20대 대선에서 어떤 리더십을 지닌 대선 주자가 당선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특히 청년들에게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편 가르기보다는 국민 전체를 통합하고 지역을 화합시킬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주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를 바란다.

/문성진 논설위원 hnsj@sedaily.com

He is…

1948년 대전에서 태어나 대전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정당학회 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회장과 국회입법조사처장 등을 지냈다. ‘해방정국 논쟁사’ ‘미소공동위원회 연구’ ‘해방정국의 정치 이념과 노선’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인식과 논리’ 등의 글을 쓰는 등 해방 직후 정세 연구에 집중해왔다. ‘한국민주당연구’ ‘인민당연구’ ‘한국 정당정치사’ 등을 포함한 저서 27편과 공저 6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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