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다윈, 히틀러, 도널드 트럼프, 데이비드 보위, 그리핀도르의 모자….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생존 시기도 다르고, 심지어 사람이 아닌 모자까지 껴 있는 기묘한 조합이지만, 여기에는 분명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생물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점이다. 찰스 다윈의 따개비, 히틀러의 딱정벌레, 도널드 트럼프의 나방, 데이비드 보위의 거미, 그리핀도르의 모자 거미까지,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의 학명(學名)이다.
신간 ‘생물의 이름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학명에 얽힌 뒷이야기, 여러 생물의 이름에 깃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한 책이다. 생물학자인 저자가 ‘사람 이름을 단 학명’이라는 세부 주제를 통해 인간 본성부터 생물의 다양성에 대한 폭넓은 이야기를 펼쳐낸다.
신종 발견에 공을 세운 이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이름’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책은 놀랍고, 가슴 아프고, 때론 추잡한 뒷이야기를 지닌 학명도 다수 소개한다. 예컨대 화석을 연구하는 고생물학자 엘사 바르부리는 신종 삼엽충 화석에 동료 연구자 오르바르 이스베리의 이름을 따 ‘이스베르기아 파르불라’, ‘이스베르기아 플라니프론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라틴어로 파르불라는 ‘가볍다’, ‘중요하지 않다’, ‘이해심이 부족하다’는 뜻이고, ‘플라니프론스’는 ‘납작 머리’를 뜻한다. 납작한 두개골을 정신적으로 열등한 인종의 두개골 모양이라고 믿었던 이스베리에게 이 명칭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그 역시 유치한(?) 반격을 준비한다. 멸종한 어느 홍합의 속명을 ‘바르부르기아’라고 지은 것이다. 바르부리의 체구가 큰 것을 조롱하려 바르부르기아 홍합 4종(種)의 이름에 ‘뚱뚱한’, ‘넓은’, ‘사악한’, ‘계란 모양’ 같은 수식어를 붙이기도 했다. 학명을 통해 힙합 버금가는 ‘디스전’을 벌인 셈이다. 책은 이외에도 학명에는 신종 발견에 기여한 토착민 안내원이나 조수, 노동자가 제외된 경우가 많다는 점, 연구비 지원을 위해 명명권을 경매에 부쳐 기업의 마케팅 수단으로 전락한 사연 등도 소개한다.
‘생각보다 인간적인 학명의 세계’라는 부제에 걸맞게 각 장에 소개되는 학명과 사연 하나하나가 흥미롭다. 따분할 법한 동식물 이야기가 아닌, 학명을 길잡이 삼아 인간 세상의 과학·문화·역사·성(性)·종교 등을 두루 들여다보는 ‘개성 넘치는 생물학 이야기’다. 1만 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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