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조명 아래 무섭고 사납게 에너지를 발산하던 무용수가 이내 바닥에 쓰러진다. 조금 전만 해도 초록빛 머금은 나무(木)의 공간을 집어삼킨 불(火)이다. 타오르던 불꽃은 이내 다시 사그라지고, 물(水)을 상징하는 순백의 또 다른 무용수들이 등장해 씻김굿 하듯 쓰러진 존재를 끌어안는다. 잠시 후 남성 무용수들이 택견을 차용한 역동적인 군무로 땅(土)을 딛고, 밟고, 마주하며 그 힘은 탄탄하게 단련된, 원시적인 생명력을 드러내는 쇠(金)의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5행의 세계가 한 바퀴를 돈 무대에는 남녀의 만남과 사랑, 합치가 이어지고 조화를 이룬 둘은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알린다. 생성과 소멸, 죽음과 탄생이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 국립무용단의 신작 ‘다섯 오’는 그렇게 자연의 순리와 그 안의 인간을 몸짓으로 풀어낸다.
지난 2일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개막한 국립무용단의 ‘다섯 오’는 동양의 전통 사상 ‘음양오행(陰陽五行)’을 통해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진리를 확인하는 무대다. 손인영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의 취임 후 첫 안무작으로 당초 지난해 국립극장 2020-2021 레퍼토리 시즌 개막작으로 선보일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 확산으로 일정이 연기됐다.
손 감독은 2일 공연 개막 전 진행된 프레스콜에서 “개인적으로 미세먼지로 고생하면서 ‘환경으로 주제로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작품 기획의 배경을 밝혔다. 미세먼지에서 출발한 문제의식과 공연 구상은 공교롭게도 코로나 19 확산이라는 역병의 확산과 맞물려 그 주제가 더욱 뚜렷해졌다. 특히 작품 속에 등장하는 처용은 동양적인 자연관을 상징하는 존재이고, 처용무는 악운을 쫓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손 감독은 “(코로나19 상황에서) 처용이란 인물은 역병을 몰아낸다는 의미도 있어 작품의 기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섯 오는 ‘환경이 파괴된 현재-음양오행의 에너지-공존에 대한 깨달음’의 총 3막 구조로 전개된다. 1막에서는 환경 파괴로 고통받고 불안해하는 현대인 앞에 오행과 동양적 자연관을 상징하는 다섯 처용이 등장해 오방처용무를 선보인다. 2막은 음양오행의 에너지를 펼쳐낸다. 현대적인 춤사위, 승무, 씻김굿, 택견에서 영감을 받은 안무와 에너지 넘치는 군무로 오행의 순환을 재현했다. 3막에서는 지구와 우주의 연결을 보여주면서 ‘자연과 공존하는 지혜만 있다면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무용수의 몸짓과 감각적인 무대 연출이 빚어내는 미장센은 단연 돋보인다. 무대·의상·영상디자인을 맡은 정민선 미술감독은 “목, 화, 수, 토, 금은 대표적으로 사계절을 상징하는 원소로 상생 관계를 이룬다”며 “목은 초록색, 화는 붉은색 등 다섯 원소를 색깔로도 표현하려 했고, 음과 양은 색깔보다는 형태로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반사 재질의 바닥을 통해 이 같은 무대의 변화와 몸짓은 한층 더 역동적이고 신비롭게 전달된다. 음악의 구성 역시 작품 주제를 오롯이 담아냈다. 라예송 음악감독은 “목(木)의 기운을 화(火)가 잡고, 화(火)의 기운은 수(水)가 잡는 등 순서가 정해져 있다”며 “앞에 나온 악기가 다음 장면에 나오지 않게 음악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공연은 오는 5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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