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성주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이 참외다. 그도 그럴 것이 성주군 참외 생산량은 우리나라 참외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고속도로 성주IC로 접어들면 들판이 온통 비닐하우스로 뒤덮여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참외를 재배하는 하우스들이다.
하지만 지금 성주의 주인은 참외가 아니다. 전량 하우스에서 생산되는 참외는 4월이면 출하를 시작해 6월이면 농사가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참외 철이 지난 성주군의 주인은 고적한 자연 풍광과 문화유산들이다.
외지인들에게는 존재감이 없다시피 하지만 성주군민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역사 유적 중 첫 번째는 왕자의 탯줄을 묻어둔 세종대왕자태실이다. 여기서 우선 알아둬야 할 것은 이곳에 봉안된 탯줄은 세종대왕의 것이 아니라 세종이 생산한 왕자들의 탯줄이라는 점이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으로 이곳 세종대왕자태실은 지난 2003년 3월 6일 사적 제444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에는 태를 태아의 생명력으로 여겨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뤘다. 왕실에서는 전국 명당에 태 항아리를 안치했는데 그중에서도 성주의 세종대왕자태실은 가장 규모가 크다. 선석산(742.4m)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위치한 세종대왕자태실에는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 중 큰 아들 문종을 제외한 17왕자의 태실과 원손인 단종 태실 등 모두 19기가 있다.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조성된 것들이다.
19기 중 14기는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연엽대석(蓮葉臺石)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됐고 세조의 태실은 즉위한 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해 태실비 앞에 세워놓았다.
성주의 새로운 관광 아이콘으로는 역사테마공원을 꼽을 수 있다. 역사테마공원 역내에는 성주읍성과 성주사고가 있는데 읍성은 고려 우왕6년(1380년) 토성으로 축성된 후 조선 중종15년(1560년)에 석성으로 개축됐다. 임진왜란 한 해 전인 선조 24년(1591년)에는 성문을 새로 지었는데 읍성은 인현산을 진산으로 하고 남동쪽 3㎞에 위치한 성산을 안산으로 삼고 있다.
성주읍성은 북서쪽에서 유입된 이천이 남쪽을 돌아 동북쪽으로 빠져나가면서 해자 역할을 하고 있어 천혜의 요새라 할 만한데 성주목읍지에 따르면 둘레가 2.1㎞(6,755척)에 달한다. 성문은 동·서·북문 3개가 있었는데 후일 남문을 추가해 4문으로 완성됐다. 대부분 훼손됐던 읍성은 최근 재현을 마쳐 군민들이 사량하는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읍성 ‘복원’이라는 단어 대신 ‘재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확한 규모나 모습과 관련한 자료가 부족해 현존하는 근거를 기반으로 원형에 가깝게 조성했기 때문이다.
읍성 인근에는 4대 사고(史庫) 중 하나였던 성주사고가 있었다. 사고는 조선시대 국가의 주요한 역사 기록물을 보관, 관리하던 창고로 성주사고는 1439년(세종 21) 설치됐다.
하지만 성주사고에 실록이 보관된 것은 6년이 지난 1445년 12월 예빈시소윤(禮賓寺少尹) 김길통에게 태조·정종·태종의 실록을 봉안하면서부터였다. 설치 당시 실록각(實錄閣)은 관아에 인접해 있었는데 재해 위험이 커 양성지가 성주사고를 선산의 금오산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과연 그의 말대로 1538년(중종 33) 11월 6일 화재로 불타버려 지금은 빈터 근처에 사고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성주군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명소는 성밖숲이다.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된 성밖숲은 1380년대에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조성된 숲으로 300~500년생 왕버들 59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성산지(星山誌)에 따르면 조선 중엽에 서문 밖 마을의 소년들이 아무 까닭 없이 잇따라 죽어나가 지관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마을의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라며 “바위 중간 지점에 숲을 조성해야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서문 밖 이천변에 밤나무 숲을 조성했다. 임진왜란 후 밤나무를 베어내고 왕버들을 식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글·사진(성주)=우현석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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