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대통령 임기를 7개월가량 앞두고 대북·대미·대중 외교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직접 유엔총회를 찾아 종전 선언을 다시 제안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미국과 국제사회를 향해 대북 제재 완화를 강하게 주장했다. 북한도 우리 정부의 구애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문 대통령의 제안에 “좋은 발상”이라며 맞장구를 쳤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우리의 주적은 남조선이나 미국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했다. 내년 2월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종전 선언과 남북정상회담 등 ‘베이징 이벤트’를 향해 줄달음질치는 모양새다. ‘어게인(again) 2018 평창’을 재연해 내년 3월 대통령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정부와 현 정권의 재창출을 도우려는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이 이런 얄팍한 여론 공작에 호락호락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 개성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연평도 해역 공무원 총격 등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북한의 도발을 국민은 잘 알고 있다. 노무현 정부도 차기 대선을 2개월가량 남겨두고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지만 국민은 흔들림 없이 이명박 정부를 선택했다. 게다가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확실히 밝히고 실무 협상에서 구체적인 핵 폐기 로드맵을 마련하기 전에는 김 위원장을 안 만나겠다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종전 선언에 응할 가능성도 매우 낮다.
북한은 지난 1970년대 이후 평화협정 체결을 줄곧 주장해왔다. 한미는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 파괴를 겨냥한 속셈을 꿰뚫고 이를 거부해왔다. 평화협정에서 종전 선언을 떼어내 먼저 하자고 처음 나선 것은 노무현 정부였다. 문 대통령의 종전 선언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역사는 종전선언·평화협정이 전쟁으로 이어진 사례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탈레반과 북베트남이 각각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은 후 미군이 철수하고 아프가니스탄은 1년 5개월, 베트남은 2년 3개월 만에 각각 이슬람·공산 국가로 변했다. 1938년 9월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가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와 뮌헨 평화협정을 체결했지만 1년도 안 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모두 다섯 차례의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북한의 핵무장에 시간만 벌어주는 결과만 초래됐다. 문 대통령은 ‘종전 선언이 비핵화 협상이나 평화협상에 들어가는 입구’라고 했지만 북핵 폐기에 대한 보장이나 핵 폐기 로드맵도 없는 종전 선언은 대북 제재를 허물고 주한미군의 주둔 명분만 약화시킬 뿐이다. 군사력 제일주의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는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완전한 불법 핵 보유국이 완전한 비핵 국가로 바뀐 경험도 없다. 그렇지만 북한 전술핵의 위험은 날로 고조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미 올해 1월 노동당 당대회에서 핵무기를 소형 경량화, 규격화, 전술 무기화했다고 보고했다. 전문가들은 전술 핵탄두가 실전 배치돼 KN-23, 24, 30미사일과 순항미사일에 탑재될 경우 한반도 전장 환경에서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특히 우리 미사일 방어 체계로는 북한의 신형 미사일을 막아낼 수도 없다.
우리나라가 세계 6위의 군사력을 갖췄다지만 이는 재래식에 국한된 이야기다. 핵을 비핵(非核)으로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을 앞두고 결실도 찾지 못할 대북 이벤트에 매달릴 게 아니라 우리 ‘핵 안보’부터 챙겨야 한다. 약해진 미국의 확장 억제를 제도화하고 핵 관련 작전에 우리가 참여하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해 핵연료재처리 과정에서 플루토늄을 확보하는 길도 열어야 한다. 재처리는 방사능 폐기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절실하다. 북한에 평화를 구걸하며 무조건적인 포용 정책을 펼 게 아니라 북핵 억지력을 바탕으로 상호주의를 적용하며 최악의 북한 인권을 개선하는 데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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