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새로운 ‘역사결의(歷史決議)’가 나오면서 중국 정부와 기관의 관계자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시진핑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중요연설(말)’과 ‘문장(글)’은 중국인이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특히 역사결의는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새 역사결의는 무려 3만6,000여자 분량이다. A4 용지로 30여장이다. 중국 당국은 지난 16일 역사결의의 단행본을 만들어 각 기관에 보급하고 시내 서점에서도 팔기 시작했다.
‘역사결의’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걸까. 역사결의는 중국 공산당 특유의 산물이다. 과거 역사를 “내용은 이렇고 평가는 저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확정해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의 역사해석으로 구성원의 관점을 통일하는 셈이다. 중국 공산당 당원이나 중국인들은 이제 공식이든지 비공식이든지 역사결의에 나오는 대로 읊조릴 수밖에 없게 됐다. 중국 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중국 공산당의 역사결의가 중요한 이유다. 다른 나라의 경우 혹시나 자국의 역사 관련 사항이 왜곡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역사결의의 유래는 중국적 전통과 중국 공산당 특징 등이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전 왕조의 역사를 후대 왕조가 정리해 규정하는 전통이 있었다. 역사서 ‘사기’는 사마천이라는 개인이 만들었지만 이런 작업은 곧바로 국가적 사업으로 정착했다. 즉 당사와 송사, 원사, 명사 등을 만든 후대 왕조는 이런 사서 편찬을 통해 이전 왕조의 의미를 확정했다. 공통되는 점은 전 왕조가 부패로 망했고 이를 이어받은 왕조는 정당하다는 논리였다. 이와 함께 주변 국가들도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미지를 유포했다.
이와 함께 중국 공산당 독재 특유의 것으로는 행동은 물론 사상과 사고까지 통제하려는 집착 때문이다. 사람들이 제각각 역사를 해석해서는 전체주의 통치가 가능하지 않다. 역사 해석을 하나로 하면 행동까지 규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를 통해 전무후무한 ‘역사결의’라는 형식이 존재하게 됐다.
중국 공산당이 역사결의를 처음 만든 것은 지난 1945년 4월이다. 제2차세계대전과 중일전쟁이 끝나기 몇달 전이고 공산당이 중국 전체를 장악하고 새로운 국가(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기 4년 전이다. 이때 나온 것이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關于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라는 이름의 문서다. 이 문서의 이름을 따서 이후에 이런 형식을 ‘역사결의’라고 부른다.
당시 역사결의가 나온 것은 순전히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 시기를 전후해 공산당내 정치투쟁이 치열했는데 최종 승리한 마오쩌둥이 자신의 행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결의라는 기록물을 만들었다. 즉 마오쩌둥의 시각에서 중국 및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새로 서술한 것이다.
1921년 창당된 중국 공산당에서 한동안은 그냥 주요 구성원 중에 하나였던 마오쩌둥은 1935년에야 권력을 잡는다. 이른바 장정 기간의 ‘쭌이회의’를 통해서다. 남부 장시성에 있던 근거지를 서북부 산시성(섬서성) 옌안으로 옮긴 후 마오쩌둥은 내부 권력투쟁과 정풍운동 등을 통해 1945년 마침내 공산당내 최고 권력자가 됐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반대파가 있었다. 가장 강력한 존재는 왕밍 등 소련파(소련의 지원을 받는 세력)이었다. 이외에 마오쩌둥의 독재에 회의적인 다수가 존재했다.
이념적인 특면에서 마오쩌둥이 이들의 반발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산당 역사를 정리한 것이 바로 1차 역사결의다. 이 역사결의가 중국 공산당의 공식 주의주장이 되면서 마오쩌둥의 과오는 모두 묻히고 완전무결하게 옳다는 기록만 남았다. 이 역사결의 등을 거치면서 이른바 ‘마오쩌둥 사상’이 만들어졌다. 1차 역사결의를 통해 현재의 중국 매체나 예술계의 마오쩌둥 이미지가 완성됐다.
중국 공산당 역사가 이후에 순조롭게 진행됐다면 새로운 역사결의는 없었을 수도 있었다. 물론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렇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절대권력 유지를 위해 1966년 문화대혁명(문혁)을 발동했고 중국 전체가 10년의 “내란”과 “재난”에 휘말렸다. 마오쩌둥의 권력은 대단해서 그가 죽은 1976년 중국 정치와 사회, 경제는 거의 폐허가 됐음에도 그 자신은 여전히 숭배 대상이었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서는 마오가 직접 후계자로 선정한 화궈펑이 계승했다.
하지만 마오쩌둥 사후 곧바로 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났고 결국은 마오와 함께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했던 덩샤오핑이 이번에는 대권을 차지했다. 마오쩌둥이 지명한 후계자 화궈펑은 밀려났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는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1940년대 못지 않은 치열한 권력투쟁 시기였다. 덩샤오핑이 실제 권력을 장악했지만 여전히 문혁을 추종하는 화궈펑 지지자가 많았다. 이들 문혁파들은 덩샤오핑이 내세운 ‘개혁개방’까지도 반대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 역사를 또 다시 쓰기로 했다. 바로 1981년에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關于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라는 이름으로 나온 2차 역사결의다. 2차 역사결의에 ‘건국 이래’라는 말이 붙은 것은 ‘건국(1949) 이전’의 역사는 이미 앞의 1차 역사결의로 일단락됐다는 이유에서다.
2차 역사결의에서는 마오쩌둥의 절대성이 크게 흔들렸다. 물론 이를 흔드는 것이 이때 역사결의의 목적이었다. 역사결의는 마오쩌둥의 건국 이래 행동을 두고 일부는 긍정하고 나머지 일부는 비판을 한다. 특히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에 대해서는 ‘완전한 잘못’이라고 규정했다.
마오쩌둥의 마지막 사업인 문화대혁명이 잘못이라고 규정되면서 당시까지 남아 있던 마오 추종자 혹은 화궈펑 지지자들은 힘을 잃게 됐다. 역사결의는 중국 공산당원이나 중국이라면 반드시 외우고 그대로 읊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본적인 사고를 규정하고 있다.
물론 2차 역사결의가 마오쩌둥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마오는 이미 중국 공산당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공산당 독재의 근간을 흔들 가능성이 컸다. 때문에 고심 끝에 “마오쩌둥은 기본적인 면에서는 옳지만 일부 행동(문혁 등)이 나쁜 요인에 의해 잘못으로 귀결됐다”는 식으로 정리됐다.
당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사상’에 일부 문제가 있다고 해도 ‘마오쩌둥 사상’ 자체는 정당하다”든지 “마오쩌둥의 과(잘못한 것)이 3이라면 공(잘한 것)은 7이다”라는 식의 말장난으로 마오쩌둥을 완전 퇴출시켜야 한다는 일부 주장을 피해갔다. 덕분에 마오쩌둥은 살아남았고 현재도 숭배는 계속되고 있다.
(마오쩌둥에 대한 ‘공칠과삼(功七過三)’의 논리는 지금도 유명한데 물론 이는 덩샤오핑이 어떤 철저한 계량 분석에 따라 만들어낸 평가는 아니다. 앞서 마오쩌둥은 소련의 독재자인 스탈린이 사후 소련 내에서 공격을 받을 때 ‘스탈린의 공은 7이고 과는 3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변호를 했는데 덩샤오핑이 이런 논리를 따라 한 것 뿐이다. 물론 마오쩌둥도 스탈린의 공과를 계량 분석했던 것은 아니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명언은 중국에서 그대로 통한다. 1차와 2차 역사결의의 목적은 모두 분명했다. 기존 체제를 부정하고 신 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로운 권력자들의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이후 이들 역사결의는 현재까지 중국 공산당 역사, 중국 현대사를 규정하는 기본 텍스트가 됐다. 적어도 중국 내에서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
지난 11일 중국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19기 6중전회)에서 ‘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경험에 관한 결의(關于黨的百年奮鬪重大成就和歷史經驗的決議)’라는 이름의 3차 역사결의가 채택됐다. 당시는 요약본만 나왔고 닷새 후인 16일에야 ‘전문’이 모두 공개됐다.
지금 현 시점에서 3차 역사결의가 나와야 하는 이유는 별로 없었다. 1차 역사결의를 주도한 마오쩌둥과 2차 역사결의의 덩샤오핑과는 달리 현재의 시진핑으로서는 부정해야 할 과거도, 새롭게 건설해야 할 체제도 없었다. 다만 올해가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라는 사실만 있었다.
세번째 역사결의가 나온 이유에 대해서 중국 전문가들은 공통된 지적을 하고 있다. 바로 내년으로 10년 임기가 끝나는 시진핑이 여전히 장기집권 드라이브를 거는 상황에서 이념적 정리작업이 절실할 텐데 ‘역사결의’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실제 공개된 3차 역사결의 내용을 보면 이런 추측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미 과거 역사를 부정하고 나설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번 역사결의에서 새로운 부정적 평가는 없었다. 논란이 되는 문혁도 2차 역사결의와 같은 수준에서 ‘내란’으로 정리됐다. 창당 이후부터 1981년까지의 공산당 역사는 거의 정확히 2차 역사결의와 같았다.
그나마 지난 1989년의 ‘6·4 톈안먼 시위’ 사태를 “1989년 봄과 여름에 걸쳐 발생한 엄중한 정치풍파” “동란”이라고 규정한 것이 당연히 앞선 역사결의 문서상에는 없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공산당 공식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굳이 설명으로 "서방 적대세력의 선동 때문"이라는 표현을 포함시켜 미국 등 외세를 비판했다.
이후 지금까지 40여년의 역사는 덩샤오핑이 주도한 ‘개혁개방’ 시대인 데 이는 시진핑 체제의 기초와 같다. 이에 대해 3차 역사결의는 기존 개혁개방은 잘 됐지만 부패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면서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돌입했다는 식으로 시진핑의 공로를 치켜세웠다.
3차 역사결의에서 제시한 100년 공산당 역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시진핑이 집권한 9년에 할애됐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오는 2049년에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하자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3차 역사결의는 이 시진핑 9년을 신시대로 규정지으면서 ‘마오쩌둥 사상’에 비교되는 ‘시진핑 사상’(전체 명칭은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강변했다. 3차 역사결의 내용 자체는 흥미가 떨어졌지만 시진핑의 3연임을 확인시킨다는 점에서 중요도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2차 역사결의에서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을 비판하며 넣었었던 “개인숭배 금지” “종신집권 폐지” 등 표현이 이번에는 빠진 것을 두고 정말 시진핑의 초장기 집권 노림수라는 지적도 나왔다.
우리에게 제3차 역사결의가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한국과의 관련 내용 때문이다. 바로 한국전쟁에의 중공군 참전을 기술한 부분이다. 3차 역사결의는 “중국인민지원군은 씩씩하고 용맹하게 압록강을 건너, 조선(북한) 인민 및 군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를 치렀다. 이빨로 무장한 강력한 적을 물리쳐 국위와 군위, 중국 인민의 정신력을 과시하고 항미원조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신중국의 안보를 지키고 대국 지위를 널리 알렸다”고 적었다.
3차 역사결의에서 한국이 나온 유일한 부분이다. 여기서 “강적”은 직접적으로는 미국을 의미하지만 한국도 포함된다. 앞으로 이 ‘역사결의’를 달달 외울 중국인들은 한국 관련해서도 이를 기준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크다. 한중 관계가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예상이 드는 이유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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