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명장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한 분야에 평균 30년이 넘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설 자리가 점점 사라져간다는 점이다. 이들이 가진 전문 기술을 다음 세대에 전수할 기회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김주현바이각의 이철호 수석 재단사도 여느 명장들과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이십대 청년이 이철호 수석 재단사의 가게를 찾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수제양복 제작 55년 경력을 가진 이 수석은 ‘이제 가게를 접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김주현 대표가 찾아왔다고 했다. 함께 양복을 만들자고 김 대표가 제안한 그날을 기억하며 이 수석은 “막내아들 같았다”고 설명했다.
이 수석이 김주현바이각에 합류하기로 결정하기까지 3개월이 걸렸다. 그때까지 김 대표는 하루가 멀다고 이 수석을 찾아왔다고 한다. “젊은 청년이 수제양복으로 성공하고 싶다고 하니 도와주자는 마음이 들었다”는 그는 그때의 결정으로 그 누보다도 의미 있는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인천의 김주현바이각 제물포본점을 찾아가 문을 열면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양복 재단을 하느라 손놀림이 바쁜 이철호 수석을 만날 수 있다. 이젠 김주현바이각의 간판이 된 이철호 수석 재단사를 만나 그의 수제양복 제작사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 반갑다.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인천 김주현바이각의 양복재단사 이철호입니다(웃음).”
- 현재 김주현바이각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양복을 재단하고 있다.”
- 김주현 대표와 함께 일하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동인천인 인천 중구 경동은 서울 명동처럼 양복거리로 유명했다. 아주 전통이 깊은 곳이다. 그곳에서 수제양복점을 운영했다. 나이는 먹어가고 손님도 줄고 해서 ‘가게를 접을까’ 고민하던 차에 김주현 대표가 찾아왔다. 3개월을 찾아와 함께 하자고 하더라. 처음엔 고민이 돼 망설였다.”
- 가장 크게 고민됐던 부분이 뭐였나.
“나이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아직 체력은 되지만 나이가 있으니 도움이 될까 싶었다. 그런데 김 대표의 아이템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괜찮더라. 합류하고 가게 운영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니 성공하겠더라. 실제로 3년 만에 성과가 났다.”
- 처음 김 대표가 찾아와 함께 수제양복점을 운영하자고 했을 때 든 생각이 궁금하다.
“현재 내 나이가 73세고, 경력만 55년이다. 20대 청년이 와서 도와달라고 하니 막내아들 같더라. 젊은 친구가 수제양복 제작 기술을 배우고 싶고, 이 길로 성공도 하고 싶다고 하니 도와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해 이제 함께 한지 5년차다.”
- 고민 끝에 함께 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면.
“첫번 째는 젊은 친구가 자리 잡을 때까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고, 두 번째는 노후대책이 필요했다. 현재는 체력이 돼 일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를 대비해 노후자금을 마련해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할 수 있을 때 일하는 게 좋은 게 아닌가(웃음).”
- 김주현바이각에 수제양복 장인이 더 있다고 하던데.
“원래 수제양복이 재단사가 옮기면 팀이 함께 옮겨가게 된다. 가게를 접고 이곳으로 옮기면서 그동안 함께 했던 분들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인천에서는 수제양복 제작 기술로 손꼽히는 분들이다. 최고라고 해도 된다. 그런 그들의 나이가 현재 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이다.”
- 여든까지 일할 수 있는 일이 있다니 놀랍다. 어른들이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 이유를 여기서 깨닫는다.
“이 일은 기술만 있다면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 한 할 수 있다. 체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어서 그렇다.”
- 오랜기간 가게를 운영하다 합류하게 됐는데, 그때와 지금 가장 다른게 있다면.
“그때는 사장이어서 손님 상담부터 주문받고 치수재고, 재단하는 일까지 다했다. 그러다 보니 고단한 부분이 있었다. 지금은 주어진 기술만 가지고 재단일만 하면 되니까 확실히 편안하다.”
- 수제양복 제작 경력이 50년이 넘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집안에 수제양복을 하는 분이 있었다. 그분들의 영향이 컸다. 항상 부러운 마음이 있었다. 그러던 중 중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기회가 생겨 양복점에서 일하게 됐다. 처음엔 심부름부터 시작했다. 1~2년 정도 심부름만 하다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착실하게 잘하니까 당시 사장님이 재단을 배우라고 하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이 은인이다.”
- 그럼 그때 재단하는 법을 배워 수제양복점을 낸 건가.
“아니다. 그곳에서 재단을 배우며 착실히 일하다 보니 어느 날 사장님이 가게를 넘겨주겠다고 하더라. 그때 내 나이가 40대 초반이었다. 당시 사장님이 나이가 많았다. 가게를 물려주는 대신 자녀 셋의 공부를 끝까지 시켜다랄고 해서 모두 대학교까지 졸업시켰다. 지금까지도 가족처럼 지낸다.”
- 그럼 처음 일을 시작한 곳에서 50년 넘게 일을 한건가.
“그렇다(웃음).”
- 한 가지 일을 오랜 기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고비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
“사실 이렇게 돌아보면 인생에 고비가 별로 없었다. 그게 아마도 성격 탓인 것 같다. 먹고 살기만 하면 다른 것엔 크게 욕심이 없는 편이다. 그저 주어진 일에 착실하게 일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 기성복의 등장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나.
“맞춤 양복만 있을 땐 정말 잘됐다. 제일모직에서 ‘댄디’라는 기성복을 선보이고 이어 다른 곳에서도 기성복을 내놓으면서 맞춤 양복이 많이 흔들렸다. 게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임금투쟁까지 일어나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 그 시기를 어떻게 이겨냈나.
“일단 내 점포다 보니 임대료가 나가지 않았다. 양복 제작은 월급제가 아니라 제작한 건수에 따라 비용을 지급하는 구조라 고정적으로 나가는 비용이 없어 버틸 수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크게 욕심이 없다 보니 먹고 살수만 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는 성격이다. 당시에도 강화도에서 부모님이 쌀 등을 보내주셔서 생활에도 어려움은 없었다.”
-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봤을 때, 삶에서 ‘양복’이란 어떤 의미인가.
“옷은 그 사람의 인품을 만들어주는 듯하다. 중요한 자리에 갈 때 양복을 챙겨 입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옷을 만들며 지금까지 살았으니 행복한 삶이지 않나(웃음).”
- 양복을 재단하는 데 있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
“수제양복은 입는 사람에게는 편안하고, 보는 이들에게는 양복다워 보여야 한다. 그런데 간혹 손님 중에는 무조건 몸에 딱 맞게 해달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양복기술을 알다 보니 그렇게 만들면 불편할 거라는 게 보인다. 그런데도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할 때 갈등이 생긴다. 그때마다 손님을 설득하려 노력한다.”
- 양복을 입고 있는데, 일할 때 항상 양복을 입나.
“그렇다. 양복이어도 내 몸에 맞게 만들면 불편한 게 없다. 한여름에도 타이를 꼭 맨다. 매지않으면 어색하고 허전하다(웃음). 베스트는 일할 때 넥타이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잡아준다. 그래서 꼭 입는다.”
- 김주현바이각에 합류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더라. ‘더뉴그레이 아저씨즈 시니어 모델’의 옷을 만들며 함께 활동할 계획이라고.
“현재 더뉴그레이 아저씨즈 시니어 모델들의 옷을 재단하고 있다. 재단하고 가봉하는 과정에서 함께 촬영도 할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게 굉장히 흐뭇하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체력이 될 때까지 10년이든, 20년이든 양복 재단 일을 하고 싶다. 그러다 인생2막에서도 은퇴하게 되면 부모님이 살던 강화도로 내려가 지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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