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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헬싱키협정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두 얼굴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저항운동 ‘프라하의 봄’을 무력 진압해 비난을 받았으나 1970년대 미소 데탕트를 주도해 칭송 받기도 했다. 또한 1971년 소련공산당 제24차 대회에서 전유럽안보회의 개최를 촉구한 뒤 지속적인 외교 협상 끝에 ‘헬싱키협정’을 이끌어냈다.

헬싱키협정은 1975년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핀란드 헬싱키에서 개최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서 채택됐다. 소련을 포함한 유럽 33개국과 미국·캐나다 등 35개국의 정상이 서명한 이 협정에 참여한 국가들은 △동등한 주권 인정 △무력 사용과 위협 중단 △영토 불가침 등 10개 항에 합의했고 이를 근거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출범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 동안 지속된 유럽 지역의 냉전도 봉합됐다.



협정 체결까지 난관이 적지 않았다. 서방 측이 요구한 △사상·양심·종교·신앙 등 기본적 자유와 인권 존중 △인간의 평등과 자결권 보장은 비(非)민주국가인 소련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브레즈네프는 협정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협정의 정신은 대결 종식을 선언한 ‘새로운 유럽을 위한 파리헌장(1990년)’과 불가침 조항을 강화한 ‘이스탄불 유럽안보헌장(1999년)’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설로 유럽이 뒤숭숭한 가운데 헬싱키협정이 주목 받고 있다. 러시아가 이 협정을 근거로 우크라이나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추진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할 때 핵 강국이었던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협정(1994년)으로 핵무기를 포기한 뒤 국가 안보조차 스스로 감당할 능력이 없는 나라로 전락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2014년 크림반도 침공과 그 뒤의 반복적인 위협에 시달리다 못해 뒤늦게 헌법에 나토 가입을 명시하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러시아의 침공 반대’만 외칠 뿐 뚜렷한 안전보장 방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어느 나라도 믿을 수 없는 냉혹한 국제 질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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