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하우스에 고추와 생김새가 비슷한 것이 가득하다. 하나를 입에 넣었다. 매울 것 같았는데 아니다. 오히려 달다. ‘캡사이신’의 다이어트 효과가 있지만 매운맛은 느낄 수 없는 ‘캡시에이트’ 성분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농산물 ‘미니 파프리카’다.
미니 파프리카를 처음 세상에 내놓은 이는 ‘국산 파프리카의 1인자’ 권오열(64) 아라온 대표. 20일 경기도 안성 양기리 농장에서 만난 권 대표가 미니 파프리카를 개발한 이유는 이렇다. “살 빼려고 매운 고추를 먹는 것보다 다이어트도 하면서 달고 당도 억제하는 파프리카를 먹으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편하고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게 가장 좋지 않겠습니까.”
지난 2013년 대한민국 농업 명장으로 선정된 권 대표가 종자 인생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82년 서울종묘에 입사하면서부터다. 이후 39년간 종자 개발의 외길을 걸었다. 한때 수박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달고나수박’과 ‘복수박’도 그의 작품이다. 권 대표는 “달고나수박의 경우 종자로만 연 매출 100억 원을 기록하기도 했다”며 “복수박 역시 가족 분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부합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고 회고했다.
이뿐 아니다. 외국산뿐이었던 파프리카 종자를 국산화한 주인공도, 국내 최초로 탄저병과 흰가루병에 걸리지 않는 고추와 파프리카 품종을 개발한 것도 그다. 최근에는 일명 ‘칼라병’으로 일컬어지는 ‘토마토반점위조바이러스(TSWV)’를 극복한 종자를 개발하는가 하면 기능성 고추인 ‘당조고추’ 종자를 만드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권 대표는 “당조고추는 당을 억제하는 AGI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당뇨 환자들이 많이 찾는 농산물”이라며 “현재 중국 등에서 시험 재배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개발한 품종이 무려 95가지에 달한다.
그에게 육종이란 농사부터 소비까지 농산물의 모든 것을 담은 종합예술이다. 권 대표는 “종자를 키우는 것은 씨앗부터 재배, 농약, 비료, 물, 재배 후 결과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감안하고 만들어야 한다”며 “그래야 농민이 농사를 잘 짓고 상인은 유통을 쉽게 하며 소비자가 몸에 좋고 맛있는 농산물을 얻게 된다”고 강조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씨앗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여섯 번의 세대교체가 이뤄져야 한다. 제대로 된 종자를 얻으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달고나수박과 복수박, 국산 파프리카 종자가 나오기까지 10년이 걸린 이유다. 시대 상황과 환경도 변수다. 그는 “종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와 앞으로의 소비 트렌드가 어떻게 이뤄질지 예상하고 그에 맞는 목표를 설정하는 게 중요하다”며 “변화무쌍한 자연환경에 대응하는 것도 어려운 일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권 대표는 종자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결코 남에게 내 씨앗을 써달라고 요청하는 법이 없다. 심어서 좋으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농사는 참 좋은 직업입니다. 사람은 변심하지만 흙과 식물은 받은 만큼 돌려줄 뿐 배신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모든 게 내 탓이고 내 덕이죠.”
해야 할 일이 있다. 국내에서 재배되는 파프리카 종자의 99%는 네덜란드 레이크즈반사와 엔자자덴사에서 제공한 것들이다. 국산 비율은 미미한 수준이다. 품질이 낮아서가 아니라 더 우수하지 못해서다. 외국산에 익숙한 농민들이기에 비슷한 수준으로는 종자를 바꾸지 않는다. 국산 종자의 비율을 높이려면 탁월한 품질과 성능을 보여줘야 한다. 그가 15년간 이상 이어온 파프리카 개발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이유다.
권 대표는 우리 사회에 바라는 게 있다. 남을 대접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상사가 부하에게, 집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게 그의 인생철학이다. “회사에 가면 상사들이 부하 직원들에게 먼저 열심히 하면 잘 대해주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잘하기를 원한다면 부하에게 먼저 잘해줘야 합니다. 잘 먹인 소가 일도 잘하는 법이죠. 사람도 그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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