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고물가)은 더 이상 중앙은행만의 고민이 아니다. 미국·유럽 같은 강대국에서 터키·남미 등 신흥국까지 고물가가 촉발한 정치 불안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연료 가격 급등을 기폭제로 반(反)정부 시위에 휩싸인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서는 11년 전 독재 ‘도미노 붕괴’를 초래한 ‘아랍의 봄’이 재연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발(發) 인플레이션이 각국 정부의 명운은 물론 국제 정치까지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이제 집권 1년을 맞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지지율이 40%대로 바닥을 치는 근본 원인으로 ‘물가 대응 실패’를 꼽고 있다. 이미 소비자물가는 39년 만에 최고인 6.8%(지난해 11월, 전년 동월 대비)까지 치솟았다. 바이든 행정부는 독과점을 이유로 기업에 화살을 돌리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참패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잇따른 판단 착오로 바이든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만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표적 스트롱맨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성난 시위대에 결국 내각 총사퇴를 결행한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도 인플레이션 때문에 사면초가에 몰렸다. 여기에 중남미에서 좌파 집권 확산을 뜻하는 ‘핑크타이드’가 다시 불어닥치는 것도 고물가 관리에 실패한 정권에 대한 응징의 성격이 짙다. 팬데믹으로 유발된 인플레이션이 각국 정부의 운명을 쥐락펴락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브렛 스티븐스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는 “인플레이션에 따른 정치 불안이 향후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의 규모로 전개될지 예측 불허"라며 "통제되지 않는 인플레이션은 정치적 불안정과 극단주의를 부추긴다”고 꼬집었다. 블룸버그통신은 “러시아가 카자흐스탄 사태에 즉각 개입함으로써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와 서방 세력 간의 새 격전지로 비화할 가능성이 있다”며 “인플레이션이 국제 정세의 변화를 촉발하는 불쏘시개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카자흐 철권통치 휘청…美·EU·남미까지 물가폭등에 '녹다운'
[정권 흔드는 '팬데믹 인플레']
공급난·유동성과잉에 인플레 심화
카자흐 사태로 우라늄·유가 급등
토카예프 대통령, 시위대 발포 명령
유혈사태 속 美·러 새 격전지 될듯
바이든 레임덕 위기·중간선거 비상
'각자도생' 유럽은 국제위상 약화
남미 대선서도 정권교체 변수로
[정권 흔드는 '팬데믹 인플레']
공급난·유동성과잉에 인플레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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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카예프 대통령, 시위대 발포 명령
유혈사태 속 美·러 새 격전지 될듯
바이든 레임덕 위기·중간선거 비상
'각자도생' 유럽은 국제위상 약화
남미 대선서도 정권교체 변수로
7일(현지 시간)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성명을 통해 “(군대를 향해) 시위대에 경고 없이 사살하라”고 발표했다. 친러 성향의 토카예프 정부가 구소련 독립 이후 30년간 이어온 철권통치가 시위대의 반발로 붕괴 위기에 몰리자 극단적 조치에 나선 것이다. 인테르팍스통신은 이날 시위 가담자 26명이 사살됐고 3,000명 이상이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경찰관도 18명이 사망하는 등 인명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카자흐스탄 사태가 최악의 유혈 사태로 치달으면서 서구권 반발도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와 미·서구권 간에 새로운 격전지가 되는 것은 물론 앞으로 사태 진행 방향도 예측하기 더 어려워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카자흐스탄의 유혈 시위는 고물가로 들끓는 전 세계 민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앞서 물가상승률이 9%에 육박한 상황에서 카자흐스탄 정부가 액화석유가스(LPG) 가격상한제를 폐지한 게 이번 시위 도화선이 됐다.
결국 내각은 총사퇴했다. 3년 차에 접어든 코로나19 사태는 유례없는 공급난과 유동성 과잉으로 연결돼 고물가를 초래하고 있다. 체감물가가 높아지자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에 허덕이던 민심이 폭발하고 있고 이는 각국 정권의 명운을 쥐락펴락하는 데서 더 나가 국제 정세까지 뒤흔드는 양상이다. 러시아가 카자흐스탄 시위 진압을 위해 즉시 군 병력을 투입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에 나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블룸버그통신은 “카자흐스탄의 체제 붕괴는 구소련의 인근 국가로 번질 수 있다”며 “이 경우 중앙아시아 내 러시아의 영향력 축소는 시간문제”라고 전했다. 가뜩이나 우크라이나 영토를 둘러싸고 서구권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러시아 입장에서 카자흐스탄의 시위가 길어지는 것은 큰 부담이다.
한때 합리적인 지도자로 인정받았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36%(2021년 12월 기준)를 넘자 지지 기반이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이미 민심은 바닥이다. 터키의 대표적 여론조사 기관 콘다가 올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터키인 38%가 나라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HSBC의 이브라힘 악소이 애널리스트는 “터키의 물가상승률이 4월 이후 약 42%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해 그의 추락을 예고했다.
이른바 선진국들도 인플레이션 리스크에 노출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지지율은 고작 재임 1년 만에 40% 초반대로 추락했는데 고물가가 원흉으로 꼽힌다. 급기야 바이든 대통령은 가격 담합을 이유로 기업 팔 비틀기에 나섰다. 하지만 여론은 싸늘하기만 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고물가 원인을 잘못 짚었다”며 “이대로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상·하원과 주지사 모두 공화당이 장악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외신들은 중간 평가 성격인 11월 선거에서 바이든 정권이 패할 경우 민주당의 경제외교 정책의 힘이 급격히 빠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브렛 스티븐스는 “통제되지 않는 인플레이션은 결국 나라를 혼란으로 내몬다”며 “특히 미국이 확연한 긴축으로 돌아선 상황이라 각국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인플레이션의 끝은 리세션(경기침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은 기본적으로 엄청난 유동성, 공급난에 따른 고물가, 전력난 등에 따른 자국 우선주의 경향, 인력난·구인난 등으로 임금 인상, 패권 경쟁 등에 따른 무역 왜곡 등이 맞물려 있다.
이미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고물가 위험에 처한 유럽은 각자도생에 나섰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원자력발전소 재가동으로 에너지 정책 방향을 선회했다. 반면 독일은 탈원전 기조를 유지하며 재생에너지 생산 시설을 늘리고 있다. 이 같은 의견 차이는 유럽연합(EU) 결집력 약화로 이어져 국제사회에서 유럽의 위상 약화로 연결되고 있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특히 물가 불안으로 인한 개별 국가의 조치가 또다시 물가를 부추기는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는 게 문제다. 가령 전 세계 우라늄 생산의 40%를 차지하는 카자흐스탄의 갑작스런 혼란이 원자재 값 급등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미 국제유가는 슬금슬금 올라 배럴당 80달러 인근까지 치솟았다. 글로벌 에너지 조사 기관 라이스타드의 애널리스트 루이스 딕슨은 “카자흐스탄이 세계 경제의 ‘블랙스완(Black Swan·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올 예기치 못한 사건이나 사고)’이 될 수 있다”며 “당장 유가가 불안하다”고 분석했다. 7일 태국 정부가 돼지고기 수출을 3개월간 금지하기로 한 점, 앞서 인도네시아가 1월 한 달간 석탄 수출을 막은 점 등은 자국 우선주의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앞으로 희토류 등의 자원이 무기화될 가능성도 있어 물가 왜곡이 수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남미도 올해 대선이 줄줄이 있다. 지난해 말 칠레에 이어 5월 콜롬비아, 10월에는 브라질에서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는데 인플레이션 대응이 관건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소비자물가상승률이 50%를 넘고 브라질도 10%를 웃돌고 있다.
밀가루값 폭등에 '아랍의 봄', 빈부격차 불만에 '월가 시위' 폭발
10년 전에도 경제發 정치불안
금융위기 따른 '돈풀기' 이후 발생
10년 전에도 경제發 정치불안
금융위기 따른 '돈풀기' 이후 발생
과거에도 인플레이션 같은 경제문제가 정정 불안으로 이어진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지난 2010년 말 중동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운동 ‘재스민 혁명’이 불러온 ‘아랍의 봄’이 대표적이다. 중동 지역에는 리비아를 무려 42년이나 장기 집권한 무아마르 카다피로 상징되는 독재정치가 만연해 있었고, 권력층의 부패 또한 심각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이 주변 아랍국으로 들불처럼 번질 수 있었던 기폭제는 밀가루 값 폭등이었다. 국제 식량 가격은 ‘아랍의 봄’ 직전인 2007년에서 2008년 사이, 또 2010년에서 2011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총평균 100% 이상 급등했다.
여기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당시 이상 고온으로 밀 수확이 감소하자 중동으로 가는 수출 물량을 확 줄인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식량난에 허덕이던 중동 지역민들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들고 일어섰고, 이게 도미노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이었다.
초강대국 미국 역시 경제발(發) 정치 불안의 예외가 아니다. 금융위기 여파가 이어진 2011년 미국은 실업률이 최대 9%까지 치솟는 등 암울한 경제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금융위기를 일으킨 월가 금융사들은 나라 재정으로 구제금융을 받은 것은 물론 임원들이 보너스로 수백억 달러를 나눠 가졌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분노한 시위대는 ‘1%를 위해 99%가 희생하는 양극화가 문제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월가로 모여들었다. 이 밖에 2011년 영국과 스페인·이스라엘 등에서도 빈부 격차와 생활고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이런 현상들이 각국이 2008년 금융위기에 대응해 대거 ‘돈 풀기’에 나선 후 몇 해 뒤인 2011년에 집중된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각지에서 야기하고 있는 정치 불안이 10년 전과 상당 부분 닮아 있다는 의미다.
인플레 자극 요인도 나라마다 다양…美 '임금' 유럽 '친환경' 남미 '포퓰리즘'
세계 각국마다 인플레이션이 촉발된 양상도 서로 다르다.
경제 회복세에 접어든 미국은 구인난이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있다. 6일(현지 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뉴욕 메트로폴리탄 교통국은 이번 주 직원 1,300명이 결근했다고 밝혔다. 코로나19 확산 탓도 있지만 최근 미국의 구인난의 진짜 원인은 높은 퇴직률에 있다. 지난해 11월 퇴직한 미국 노동자는 450만 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기업들은 임금 인상으로 대응하고 있다. 실제 미국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지난해 5월부터 올라 11월 시간당 31달러를 넘어섰다.
유럽은 ‘그린플레이션(친환경 정책에 따른 물가 상승)’으로 시름하고 있다. 탈석탄 전환 정책에 속도를 내던 중 기후변화로 재생에너지 발전에 차질이 생겼다. 여기에 겨울 추위가 닥쳐 난방 소비가 급증하자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했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갈등은 천연가스 공급 불안정으로 이어졌다.
중남미를 덮친 인플레이션은 포퓰리즘으로 더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인플레이션에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재정 지출을 확대하고, 이것이 또 물가를 자극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는 3월 칠레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가브리엘 보리치는 칠레는 학자금 대출 탕감·재정 지출 확대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에 지난해 11월 이미 6.7%까지 치솟은 인플레이션 상승률은 더욱 오를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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