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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고 뚫어 피워올린 꽃

'단색화' 대표작가 권영우 개인전

미공개작 18점, 국제갤러리서 30일까지

우연성,물질성,촉각성 등 흉내못낼 미학

권영우의 1982년작 '무제'. 한지를 겹겹이 바른 후 찢어 만든 작품이다.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조물주는 만물을 만들었지만 이름은 붙이지 않았습니다. 자연 그 자체가 곧 추상인 셈이지요. 저는 단지 자연의 여러 현상들에서 발견하고, 선택하고, 이를 다시 고치고 보탤 뿐입니다.”

종이를 찢고 뚫고 붙이며 작업한 권영우(1926~2013)의 덤덤한 고백이다. 1946년 서울대 미술대학 제1회 입학생으로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지필묵(紙筆墨)에서 종이만 취했고, 평생 그 종이 만을 탐구했다. 한지를 칼로 긋고 그 갈라진 틈에 색을 입힌 권영우의 대표작은 번지는 속성의 먹과 뭉치는 습성의 과슈(수용성 안료)가 이뤄낸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예술적 성취를 이뤄냈다. 동시에 이 작업은 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나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작가가 꾹꾹 눌러 담은 분단 조국의 상흔을 떠올리게 하기에 의미심장하다.

재료의 물성을 연구하며, 수행에 가까운 반복적 행위, 특유의 단색조 화면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그는 대표적인 ‘단색화’ 작가로 꼽힌다. 단색화의 시초가 된 1975년 일본 동경화랑의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 전에 참가한 ‘오리지널 멤버’이기도 하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가 권영우의 작품 2점을 영구 소장 하는 등 국내외에서 작가에 대한 재조명이 한창인 가운데 전속화랑인 국제갤러리가 권영우의 미공개 작품 18점을 포함한 개인전을 K2전시장 1,2층에서 열고 있다.

권영우의 1980년대 작품 '무제'. 한지 위 먹선의 중첩 효과가 특징이다. /사진제공=국제갤러리


1층의 미공개 작품들은 1980년대 한지에 먹으로 그린 작품들과 같은 시기의 색채 작업, 2000년대 캔버스에 붙인 한지 작업으로 크게 나뉜다. 1960년대는 그에게 새로운 동양화를 위한 탐색의 시기였고, 그는 붓 없이 손톱이나 직접 만든 도구로 종이를 자르고 붙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나의 손가락이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했을 정도다. 행위의 우연성, 종이의 물질성, 그리고 이 둘이 만나 이룬 촉각성이 핵심이다.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1978~1989년 파리에 머물렀는데, 전시작들은 권영우의 ‘파리 시기’를 보여준다.

먹 묻힌 넓은 붓으로 그은 획이 한지 위에 사각형처럼 놓였다. 붓질이 겹칠수록 색이 짙어진다. 맞은 편 캔버스 위에 한지를 붙인 작업과 대구를 이룬다. 오려 붙인 한지가 겹쳐질수록 흰색이 더 밝게 빛난다. 그 여운을 안고 가운데 벽에 걸린 색채 작업을 보면 먹선의 미묘한 번짐을 가르고 종이 뒤에서 색이 빛으로 뿜어나오는 듯하다.



권영우의 2000년대 작품 '무제'. 캔버스 위에 잘라 붙인 한지가 겹칠수록 더 흰빛을 띤다. /사진제공=국제갤러리


2층 전시장에는 찢고 뚫은 권영우들의 대표작들이 시대를 관통하며 선보였다. 많은 이들이 캔버스를 칼로 자른 루치오 폰타나와 권영우를 비교하곤 한다. 폰타나의 찢은 화면이 캔버스를 초월한 공간감으로 들여보내는 문(門)이라면, 권영우가 뚫은 한지는 종이 위에 사뿐히 피워올린 꽃(花)이다. 작가는 겹겹이 쌓듯 종이를 붙여 올렸고, 그 질긴 한지에 일일이 구멍을 뚫어 꽃을 피워올리듯 작품을 완성했다. 겹치는 한지의 미묘한 깊이감은 흰 빛이 새벽에 눈 내리는 요즘 같은 계절에 잘 어울린다. 30일까지.

권영우의 1980년대 '무제'. 한지를 겹겹이 바른 후 일일이 구멍을 뚫어 제작했다. /사진제공=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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