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범죄피해평가 제도를 운영하면서도 실제 현장에 제대로 적용하지 않고 있다. 스토킹 등 보복 범죄를 막을 수단이 있는데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으면서 뒷북 대응책만 쏟아낸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경찰청이 지난해 10월 고객만족모니터센터를 통해 구속영장 신청 경험이 있는 경찰관 39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범죄피해평가 제도를 알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60%(239명)였다.
범죄피해평가 제도를 알고 있는 경찰관 239명에게 구속영장 신청시 범죄피해평가서를 첨부하는지 묻는 질문에는 ‘첨부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비율은 67%(160명)에 달했다. 경찰관 10명 중 6명만 범죄피해평가제도를 알고 있고 알더라도 활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셈이다.
경찰은 피해자 고통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형사절차에 반영하겠다는 취지로 2016년부터 범죄피해평가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면담을 통해 파악한 피해 내용을 보고서에 담아 수사관에게 전달하면 수사관이 구속영장 신청 때 제출할 수 있다. 보복범죄 가능성을 직·간접적으로 판단할 자료로서 영장 발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경찰관들의 인식처럼 일선 경찰서에서도 범죄피해평가 활용도는 떨어진다. 2016년 101개 경찰서에서 시범 도입 후 지난해 사용처가 208곳으로 늘었으나 여전히 50곳 정도에서는 활용되지 않는다. 실시 건수도 2020년 기준 988건에 그쳤다.
하지만 범죄피해평가서를 써 본 경찰관들은 평가서가 피의자 구속, 피해자 보호에 효과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구속영장 신청시 범죄피해평가서를 첨부한 경험이 있는 경찰관 79명에게 평가서가 구속영장 발부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지 묻는 질문에 73.4%(58명)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처럼 효력이 있는데도 경찰이 범죄피해평가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이유는 법제화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법률이 아닌 ‘경찰수사규칙’(행정안전부령)과 ‘피해자 보호 및 지원에 관한 규칙’(경찰청 훈령)에 근거해 의무 사항은 아니다.
경찰이 스토킹, 데이트 폭력 등에 대한 특별전수점검을 실시하며 보복 범죄 대응책을 쏟아내지만 정작 기존 제도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혁 부경대 법학과 교수는 “범죄피해평가는 피의자 구속은 물론 양형에도 반영될 수 있고 피의자·피고인의 기본권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법률로 제도를 규율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평가 내용에 피해자 등에 대한 위협이나 보복범죄의 위험성을 명확히 드러내는 항목을 추가할 필요도 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관련 예산을 증액하는 등 범죄피해평가 제도 확대에 힘쓰고 있다는 입장이다. 운영예산을 지난해 2억7,300만원에서 올해 3억7,800만원으로 늘리고 사용처도 지난해 208개서에서 올해 230개서로 확대하기로 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범죄피해평가는 형사, 여성청소년 관련 사건에서 주로 활용되고 피해자 동의를 전제로 한다"며 “구속영장 청구 외에도 사건을 송치 할 때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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