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일곱 차례나 이어진 북한 미사일 도발에 문재인 대통령의 5년 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북한이 미국령 괌까지 사정권에 둔 미사일을 실전 배치하면서 국제 사회의 압박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 중국까지 제 갈 길을 가는 행보를 보이면서 문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더욱 줄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17년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문재인 정부의 평화 정책으로 해소했다’는 주장도 명분을 잃게 될 수 있다는 진단이다. 문 대통령 역시 더 이상 ‘종전선언’이라는 용어도 쓰지 않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평화의 제도화’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뜻을 에둘러 표현한다. 차기 대통령이 집권하더라도 임기 초부터 한반도 안보 위기 상황을 무겁게 떠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北 미사일 7번째 발사…文대통령 1년만에 NSC 주재
합동참모본부는 지난달 30일 북한이 오전 7시52분께 자강도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중거리 탄도미사일 1발을 발사한 것이 포착됐다고 밝혔다. 올 들어 7번째 무력 시위다. 같은 달 27일 지대지 전술유도탄 2발을 발사한 이후 사흘 만이다.
조선중앙통신은 북한이 이날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인 화성-12형 검수사격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31일 알렸다. 검수사격은 생산 배치되는 미사일을 무작위로 골라 품질을 검증하는 시험 발사를 뜻한다. 합참은 북한이 고각으로 발사한 미사일의 비행거리를 약 800㎞, 정점 고도를 약 2000㎞로 파악했다. 30∼45도의 정상 각도로 쏠 경우 최대 사거리는 4500∼5000㎞로 추정된다. 평양에서 3400여㎞ 떨어진 미국령 괌까지 사정권에 두고 화성-12형을 실전 배치했음을 확인한 것이다.
북한 도발 수위가 점점 올라가자 문 대통령도 무려 1년 만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직접 주재했다. 30일 NSC 긴급 전체회의를 소집한 문 대통령은 ‘도발’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배”라는 표현은 썼다. 문 대통령이 NSC 전체회의를 직접 주재한 것은 지난해 1월21일 미국 바이든 행정부 출범에 맞춰 회의를 연 게 마지막이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에서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로 이어지면서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이는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안정, 외교적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대한 도전이자 유엔 안보리 결의에 위배되는 행위로 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북한은 긴장 조성과 압박 행위를 중단하고 한미 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화 제의에 호응하라”고 촉구하면서 “북한이 그동안 대화 의지를 표명하면서 핵실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유예 선언을 지켜왔는데,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라면 모라토리움 선언을 파기하는 근처까지 다가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
NSC 상임위원들도 이례적으로 규탄 입장을 냈다. 서훈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이어진 상임위에서 참석자들은 “북한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안정에 대한 국제사회의 외교적 해결 요구와 유엔 안보리 결의에 대한 도전으로서 이를 규탄한다”며 “북한은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고 지역 정세의 불안정을 초래하는 행동을 즉각 중단하는 동시에 모라토리엄을 유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의 길로 조속히 나올 것을 촉구한다”며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만반의 안보태세를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난 수위 높이는 국제사회…北 “적대정책 철회” 되풀이
북한의 잇딴 도발에 미국과 서방세계는 즉각 강한 비판을 내놓았다. 미국 국무부는 2일 웬디 셔먼 미국 부장관이 최종건 외교부 1차관, 모리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통화를 한 사실을 전하며 “셔먼 부장관이 북한의 최근 점증하는 탄도미사일 발사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는 것이며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했다”고 밝혔다. 세 장관은 한미일 삼각 공조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며 북한이 대화와 외교의 길로 나올 것을 촉구했다.
EU 대변인은 역시 지난달 31일 미국의소리(VOA)에 보낸 논평에서 “북한의 반복적이고 노골적인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은 국제사회의 더 엄격한 제재 이행 필요성을 강화할 뿐”이라고 밝혔다. 그는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는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 행동의 우려스러운 격화를 보여준다”며 “한반도의 지속 가능한 평화와 안보 구축을 위한 여건 조성을 목표로 한 미국, 한국과의 의미있는 대화 과정에 관여할 것을 북한에 거듭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또 “EU는 다수의 유엔 안보리 결의가 요구하는 것과 같이 북한이 대량살상무기와 탄도미사일, 기존 핵 프로그램을 포괄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포기하는 목표에 전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 외무성은 이에 2일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고 “미국은 그 무슨 ‘외교적 해결’과 ‘대화’에 대해 떠들기 전에 우리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그만두고 대조선(대북) 적대시 정책부터 철회해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북한 외무성은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조선반도(한반도) 정세가 긴장 격화의 소용돌이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 때문”이라며 “최근 연간에만도 미국은 저들이 직접 중지를 공약했던 합동군사연습을 수백 차례나 벌리고 첨단 군사 공격 수단들과 핵전략 무기들을 남조선과 조선반도 주변 지역에 끌어들이면서 우리 국가의 안전을 엄중히 위협했다”고 주장했다. 북한 외무성은 이달 1일에도 일본·프랑스의 북핵·미사일 폐기 요구 공동성명을 두고 “명백한 반공화국 적대 행위로 정정당당한 자위권 행사에 대한 용납 못 할 도전”이라고 맹비난했다.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도 2일 “어느 나라든 조선(북한)에서 진행되는 미사일 시험발사나 검수사격을 걸고들지(시비 걸지)만 않는다면, 조선의 주권 행사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조선반도 긴장이 유발되는 일은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국방력 강화는 원래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리”라며 “조선의 핵 무력 완성을 기점으로 조선반도(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정치 구도와 역량 관계에도 근본적 전환이 일어났다”고 평가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북한이 올 여섯 번째 미사일을 쏜 27일 기자들과 만나 “뉴욕타임스는 ‘북한 미사일 발사의 함의’라고 하는 제목의 글 통해 ‘중국이 올림픽에 집중하고, 한국은 대통령 선거 정국이고, 미국은 우크라이나 상황 등에 집중하는 시점에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발사하는 의미가 있다’고 보도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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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美中 정상 소통 기회는 사라져
한반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미국, 중국과 현 정부 간 소통 기회도 사라지고 있다. 코로나19와 주변 여건 상 양국 모두 문 대통령보다는 한국의 차기 대통령와 대북 문제를 논의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요미우리신문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오는 5월 하순께 한국을 방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1일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의 안보협의체인 쿼드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5월 하순에 일본을 방문하는 방안을 조율하고 있다. 또 복수의 미일 정부 관계자는 바이든 대통령이 이를 계기로 한국도 방문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이 성사되면 이는 문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는 5월9일 직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이후 51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69일, 문 대통령은 49일 만에 방미길에 올랐는데 차기 대통령은 이보다 더 빨리 한미정상회담을 할 수도 있게 된다.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하면 최근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는 대중·대북 전략과 관련해 차기 대통령과 새 관계를 설정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을 부각하면서 문재인 정부 들어 껄끄러워진 한일 관계가 새 전기를 맞을지도 관건이다.
바이든 정부는 주한 미국 대사도 1년 이상 임명을 미루다 최근 ‘대북 제재 전문가’인 필립 골드버그 주콜롬비아 대사를 내정했다. 관련 절차에 소요되는 시간을 고려하면 골드버그 대사가 실제 부임하는 시기 역시 한국의 정부가 교체될 즈음일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문 대통령 간 정상통화도 차일피일 미뤄졌다. 당초 외교가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다녀온 직후인 1월말께 시 주석과 통화를 할 것으로 관측했다. 하지만 한중 정상통화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개막한 뒤에도 일정이 잡히지 않았다. 문 대통령과 시 주석이 전화 통화를 한 것은 지난해 1월26일이 마지막이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3일 “아직 구체적으로 시기가 결정된 바 없다”며 “한중 양측은 정상 간 교류가 양국 관계 발전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다”고만 설명했다.
중국은 지난달 20일 북한 미사일 개발 관련자들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대상에 추가하려는 미국 측 시도를 불발시킨 바 있다.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 결정은 15개 이사국의 만장일치가 필요하다. 류샤오밍 중국 한반도사무특별대표는 같은 날 노규덕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의 통화에서 “미국은 대북 제재 만능론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은 6일 강경 메시지 가능성 주목…정권 재창출엔 악재
외교가에서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6일 남한의 정기국회 격인 제14기 제6차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외 강경 메시지를 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김정은이 이 회의체의 대의원은 아니지만 지난 2019년 이후 시정연설을 통해 수시로 대외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201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에 3차 북미정상회담 용의가 있다고 밝혔고 지난해 9월 회의에서는 남북 통신연락선 복원 의사 등을 전달했다. 북한 매체들은 이번 최고인민회의 의제는 2021년 사업 정형(실태)과 예산 결산, 2022년 과업과 예산, 육아법·해외동포권익옹호법 채택 등이라고 짧게 소개했다.
김정은은 1일에도 아내 리설주와 함께 평양 만수대예술극장에서 설 명절 경축 공연을 관람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리설주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해 9월 9일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한 후 145일 만이다. 조선중앙통신은 오는 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든 번째 생일(광명성절)을 앞두고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면서 “전체 인민이 김정은 동지의 사상과 영도를 충직하게 받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은 위대한 장군님의 간곡한 유훈”이라고 2일 강조했다. 조선중앙TV는 1일 ‘위대한 승리의 해 2021년’ 이라는 제목의 기록 영화를 통해 살이 빠진 김정은이 전속력으로 백마를 타는 장면을 공개했다.
북한이 도발을 이어가고 김정은까지 강경 메시지를 내놓을 경우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게는 상당한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5년 동안 국민들에게 ‘평화 캠페인’을 벌인 성과가 무엇이냐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9년 2월 이른바 ‘하노이 노딜’ 이후 단절된 남북 관계는 2020년 1월 북한의 코로나19 국경 봉쇄 이후 완전히 차단됐다. 그 사이 2020년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같은 해 9월 공무원 피격 사건 등에 대한 진상 조사나 사과 조치도 못 받았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도발 수위를 계속 끌어올려 핵 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 등 ‘레드라인(한계선)’을 넘어설 것이란 우려도 있다. 북한은 앞서 지난달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 맞춰 당 정치국 회의를 열고 핵·미사일 개발에 대한 모라토리엄(유예) 해제 검토를 공개적으로 시사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문재인 정부식 한반도 정세 관리가 과연 전환점을 찾을지도 대선 국면에 주요 관건이 됐다.
※‘국정농담(國政濃談)’은 행정·외교안보·정치 관련 ‘농도 짙은’ 현장 이야기와 현안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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