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로 만든 모형이 뭐 그렇게 대단할까 생각했다. 그냥 모양만 얼추 갖춘 것일 거라고 예단했다. ‘뉴저지호’ ‘충무공 이순신함’ 등 전함 모형을 보는 순간 이러한 편견은 여지없이 깨졌다. 조타실(아일랜드)과 주포, 구명정에 갑판 손잡이까지…. 실물의 200분의 1, 150분의 1밖에 안 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함선이다.
나무 조각으로 작은 세상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23년 경력의 목재 모형 제작자 송정근(67) 씨. 해군참모총장배 모형함정대회에서 두 번이나 은상을 차지한 송 씨는 원래 해군을 제대한 후 평범히 살아가던 직장인이다. 지금도 그에게 모형은 요즘 청년들 언어로 ‘부캐(부캐릭터)’일 뿐 ‘본캐’는 전기 설비 안전 관리다. 송 씨가 본격적인 ‘목재 모형 덕후’가 된 것은 지난 1999년. 여가를 ‘오롯이 나만을 위해 쓰자’는 생각에서였다. 충남 천안 백석동 자택에서 만난 그는 “남자들은 일만 알지 자기 시간을 갖는 데 익숙하지 않다”며 “경제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즐기면서 살다 보니 행복도는 단연 최고”라고 자랑했다.
모형은 ‘느림의 미학’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송 씨는 필요한 모든 것을 나무를 깎아 만든다. 선체부터 함포·격납고, 심지어 조명 장치까지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전함 한 척을 만드는 데 필요한 부품은 1만여 개다. 완성까지는 하루 3~4시간씩 약 1200~1500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만든 함선 모형이 지금까지 22개나 된다. 전함 한 척 만드는 데 1년이 넘게 걸린다는 의미다. 미국 항모 ‘니미츠’ 모형은 2년째 붙잡고 있지만 완성하려면 아직도 반년 정도 더 투자해야 한다. 그는 “목재 모형은 아날로그 감성이 필요한 작업”이라며 “결과가 빨리 나오는 데 익숙한 청년들은 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모형 작업은 험난함의 연속이다. 도면을 팔거나 책에 설계도가 나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부지기수다. 특히 한국 함선의 경우 도면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일일이 사진을 찾아 도면화해야 한다. 송 씨가 가진 우리나라 구축함 ‘충무공 이순신함’의 도면은 어디서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다. 웬만한 전문가 뺨치는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목재 모형만 고집하는 데도 이유가 있다. 플라스틱 모형은 짧은 시간에 많이 만들 수 있어서 애착이 덜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관리도 힘들다. 플라스틱 모형 비행기의 경우 일주일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작품을 전부 보관하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한데 쉽지 않다. 결국 보관 장소를 찾지 못해 폐기하거나 방치되기 일쑤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목재 자체가 주는 즐거움은 더 크다. 송 씨는 “나무만이 주는 질감에서 자연의 온화함과 따뜻함을 느끼고는 한다”며 “그것으로 전쟁 무기를 만든다는 것이 아이러니해 고건축물을 제작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모형 제작을 ‘가성비 갑’인 여가 생활이라고 강조한다. 전함 한 척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목재를 사는 데 필요한 10만~20만 원이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시간만 있으면 된다. 게다가 부품 하나를 만들 때마다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1척 만드는 데 1만 개의 부품이 필요하니 1만 번의 보람을 느끼는 셈이다. 송 씨는 “딸이 ‘아버지에게 나무토막 하나만 주면 1년 동안 잘 지낼 수 있다’고 하더라”며 “골프 같은 운동이 최고의 취미라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에게는 모형 제작이 최고”라고 덧붙였다.
모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 나왔다. “언젠가 모형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세 가지를 지킬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되는지, 시간이 남는지, 마지막으로 배우자가 묵인할지였죠. 모형을 하다 보면 시간을 온통 빼앗깁니다. 그것 때문에 가정불화가 올 수도 있죠. 나는 한 달에 한두 번 아내와 꼭 여행을 갑니다. 이것을 잘해야 취미를 오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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