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은 다 실화다. 완전히 꾸며낸 부분만 제외하고."
자신들의 견고한 카르텔을 만들고, 그 안에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해 부를 축적하는 엘리트 사회는 오만하다. 때론 오만함이 허점으로 작용한다. 작은 틈새를 파고들면 어느새 그들만의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다. '애나 만들기'는 작은 틈새를 파고든 소녀가 엘리트 층을 상대로 거액의 투자 사기를 벌이는 실제 사건을 그린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애나 만들기'는 기자 비비안 켄트(안나 클럼스키)가 독일 출신 상속녀 신분으로 속이고 뉴욕 엘리트 층에 접근해 금융 사기 행각을 벌인 혐의로 기소된 애나 델비(줄리아 가너)를 취재하는 이야기다.
맨해튼 잡지의 기자 비비안은 고작 26살의 나이에 은행, 호텔, 항공 등 뉴욕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을 속인 애나에게 비범함을 느끼고 취재에 나선다. 애나를 만나기 위해 구치소를 찾은 비비안. 애나는 VIP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언론 면회가 아닌, 일반 면회로 찾아온 비비안에게 무안을 주고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다. 결국 비비안은 애나의 SNS를 통해 주변 사람들 탐문에 나서면서 그간 애나의 행적을 되짚기 시작한다.
화려한 언변, 잡지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패션 센스, 바비 인형 같은 외모로 뉴욕 유명 인사들을 사로잡은 애나는 뉴욕 최고의 건물에 자신의 이름을 딴 소셜 클럽을 차린다는 거대한 욕망을 지녔다. 가진 게 없는 애나가 약 4,000만 달러(한화 477억 원)의 규모를 자랑하는 사업을 꿈꾼 건 뜬구름이 아니었다. 독일에서 온 상속녀로 자신을 포장한 애나는 인맥과 언변을 이용해 뉴욕 유명 인사들에게 접근했고, 4,000만 달러 은행 대출을 목전에 뒀다. 한 발자국만 더 가면, 애나의 소셜 클럽은 현실이 되는 상황이었으나 결국 자신의 거짓말에 발목이 잡힌다.
애나는 사업가인가 사기꾼인가. 만약 은행 대출이 실현돼 소셜 클럽이 열리고, 큰 성공을 거둔다면 역사는 그를 최연소 여성 사업가로 기억할 거다. 그러나 애나는 자신의 거짓말을 뛰어넘지 못했고, 인맥으로 모든 게 이어지는 뉴욕 사업가들의 허점만 꼬집은 셈이 됐다. 콧대 높은 뉴욕 엘리트들이 애나의 겉모습에 속아 거액의 돈과 시간을 내놓은 건 블랙 코미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애나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다. 셀프 브랜딩(Self-branding) 시대에 눈 높은 뉴욕 사업가들에 맞춰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 만들어진 애나의 겉모습에 속아 먼저 돈과 시간을 내놓은 건 기회를 잡기 위한 엘리트들이었다. 애나는 은행과 친구에게 빌린 거액의 돈을 소셜 클럽이 완성되면 갚을 생각이었기에 시종일관 당당했다.
애나가 쌓은 인맥은 거짓이 들통나면서 한순간에 무너진다. 뉴욕 인사들은 모두 애나와 얽혔던 사실이 드러나길 꺼려 하며 스스로 고소를 취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돈이 아닌 마음으로 애나를 아낀 단 한 명의 친구만 남았을 뿐이다. 모든 것을 잃은 애나지만, 거짓을 잃고 진실을 취해 오히려 후련한 표정을 짓는다.
이야기는 기자인 비비안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전개된다. 하나둘씩 진실과 거짓일 가려내는 비비안과 함께 시청자들도 애나의 베일을 벗기는 구조다. 마치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듯 실마리를 따라 애나의 실체를 파헤치는 전개는 카타르시스를 자아낸다. 애나의 주변 인물들에게 연락하기 위해 모든 호텔에 전화를 걸고, SNS 속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는 비비안의 모습은, 기사를 완성해 내겠다는 그의 또 다른 욕망으로 귀결된다.
작품 전개와 상관없이 비비안의 출산 과정이 그려지는 점도 흥미롭다. 수개월 동안 애나를 취재하면서 커리어를 쌓던 비비안이 임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심리 상태가 세밀하게 표현된다. 아이의 성별을 알게 되던 행복한 순간에도 비비안은 "커리어가 끊기면 어떡하냐"고 울부짖을 정도로 극심하게 스트레스 받는다. 여성의 커리어와 임신, 출사, 육아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이 모든 건 실화로 4 간의 사기 행각이 발각돼 2017년 체포되고, 2019년 실형을 선고받은 애나 소로킨의 이야기다. 잘못을 인정한 애나 소로킨이 2021년 가석방으로 풀려나면서 자신의 스토리를 넷플릭스에 팔면서 드라마화됐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말이 있다. 외국 출신의 소녀가 콧대 높은 뉴욕 엘리트들을 사로잡아 유명 인사가 되고, 감옥에 가는 과정이 실화라는 점은 놀랍다. 엘리트 사회의 허점을 파고든 '애나 만들기'였다.
◆ 시식평: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보는 흡입력. 시간이 넉넉할 때 정주행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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