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지금까지 최소 39곳의 문화유산과 박물관 등을 파괴하거나 약탈한 것으로 드러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정체성 지우기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온다.
28일(현지시간) 미국 NBC뉴스에 따르면 키이우에 있는 비영리 정치단체 '트랜스애틀랜틱 대화 센터'는 러시아 침공 이후 전국에서 최소 39곳의 주요 역사·문화 시설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했다고 전했다. 하르키우 미술관 미즈기나 발렌티나 관장은 예술작품 2만5000여 점이 있는 미술관 주변에 포탄이 떨어져 직원들이 작품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야 했다고 말했다.
미술관보다 하루 앞서 포격을 받은 17세기 유산 하르키우 홀리 도미션 성당은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성당 안에 대피해 있던 민간인들은 다치지 않았으나 이 공격으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이 깨지고 일부 장식물들이 심하게 파손됐다.
마리우폴 시의회는 텔레그램을 통해 우크라이나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 2000여 점이 전시된 아르히프 쿠인지 미술관을 러시아군이 파괴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도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1만5000여 명이 학살당한 드로비츠키 야르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파괴했다면서 "정확히 80년 만에 나치가 돌아왔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7곳 있으며 1954년 체결된 헤이그협약은 역사적 기념물과 문화유산을 목표로 공격하는 행위를 국제법상 전쟁범죄로 규정한다. 일부 문화 당국은 현재 러시아가 저지르고 있는 문화유산 파괴가 이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
이리나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문화부 전 차관은 "러시아가 주택과 병원 학교는 물론 문화유산까지 목표로 삼고 있는 것 같다"며 "그들은 우크라이나를, 즉 우리 유산과 역사, 정체성, 독립국으로서의 우크라이나를 지도에서 아예 지워버리려 한다"고 말했다. 다만 러시아군의 역사문화 시설 파괴가 이들 시설을 표적으로 삼은 것인지 민간인에 대한 공격 중에 발생한 부수적인 피해인지는 명확지 않다.
노스웨스턴대 요하난 페트로프스키-슈테른 교수는 "러시아의 역사문화시설 파괴는 고의적일 가능성과 부수적인 피해일 가능성이 모두 있지만 '고의적인 파괴'로 볼 여지가 더 많다"며 "러시아는 점령지 도서관에서 우크라이나 역사 교과서를 압수해 불태우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침공 전후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부정하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에는 독립국이라는 게 없다. 현재의 우크라이나는 전적으로 러시아, 옛 소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포돌랴크 전 차관은 "이러한 러시아의 주장은 순전히 허구이고 아픈 사람의 상상일 뿐"이라며 "이는 푸틴이 선택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의 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국민은 역사문화 유산 파괴를 막기 위해 중요한 유물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거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시설물 위에 보호 장치를 씌우는 등 대책 마련에 주력하고 있다. 다만 이런 조치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