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르의 영화에서 절대 빼놓으면 안 되는 요소가 있다면 화면의 역동적 움직임, 수려한 시각효과, 액션 연출 같은 화려한 볼거리를 꼽곤 한다. ‘스타워즈’ 같은 쉬운 플롯의 스페이스 오페라는 물론 ‘블레이드 러너’ 같은 무거운 주제의 SF영화까지 모두 어김없이 포함하고 있었다. 28일 개막한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인 ‘애프터 양’은 SF물이면서도 결이 다르다. 로봇과 복제인간, 자율주행차가 등장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진정한 인간성의 의미와 인종 다양성 문제에 대해 묵직한 성찰을 보여주지만, 정적이고 미니멀한 연출로 드라마를 강조한다.
영화는 잎차를 파는 상점을 하는 제이크(콜린 패럴)와 아내 카이라(조디 터너-스미스), 입양한 중국인 딸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라위자야) 세 사람이 가족사진을 찍으면서 시작한다. 이들에겐 가족이 한 명 더 있는데, 바로 아시아계 청년의 외양을 한 안드로이드 양(저스틴 민)이다. 미카에게 나무의 접붙이기 원리를 이용해 그의 뿌리를 일깨워주고 중국어도 가르치는 등 보호자 역할은 물론 정서와 문화적 기반을 안정시키는 일을 한다.
그러던 중 양이 가족 댄스 배틀에 참가한 뒤 작동을 멈추면서 영화는 본격적 이야기를 꺼내 든다. 양에게 극도로 의지하던 미카가 정서적으로 흔들리자 제이크는 양을 수리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안드로이드와 달리 양은 기억을 저장하는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제이크는 저장된 양의 기억을 돌아보며 그의 생각을 되새김질한다.
한국계 미국인인 코고나다 감독은 영화에서 인간이 아니라 로봇인 안드로이드의 존재를 통해 인간과 가족, 인종, 죽음의 의미에 대해 고요하면서도 묵직한 성찰을 시도한다. 전진수 프로그래머는 이 영화에 대해 “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생각을 비롯해 연출가의 훌륭한 연출, 배우들의 조화 등 모두 뛰어났다”고 개막작 선정의 이유를 전했다.
영화 속에서 제이크를 비롯한 인물들이 양의 저장된 기억을 통해 과거를 돌이켜보는 과정은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 감정적, 이성적 교감을 확인하는 장이다. 양의 시점으로 바라본 가족들의 말과 행동, 인간보다 더 사려 깊게 언행을 하는 양의 모습은 진정한 인간성이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다. 더 나아가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 아시아계 딸, 안드로이드라는 다문화·다인종 가정이라는 설정을 통해 인종 다양성 문제도 짚는다.
양을 연기한 한국계 미국인 배우 저스틴 민은 이날 개막작 기자시사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 “다름이라는 게 영화의 중요한 테마라고 생각한다”며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우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 정체성과 존재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에서 양이 겪는 고민은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제가 고민하는 것과도 결이 비슷하다”며 “미국에서 한국인 가족과 살고, 한국 사람처럼 보이고, 한국말도 조금은 할 수 있지만, '이게 과연 진짜일까'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부연했다.
이 작품은 여타 SF에서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고 설정하는 것과 달리 그저 인간이건 안드로이드건 각자의 삶을 사는 게 목적일 뿐이라고 설정한 점도 흥미롭다. 저스틴 민은 촬영 당시 감독이 얼마만큼 로봇처럼 보이고 인간적이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자신이 필요한 존재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인물로 양을 해석했다는 그는 “제가 생각하는 인간성이란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한 게 아니라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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