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가 전 세계에 통한 것은 ‘여성의 시선(female gaze)’에서 이전에는 없던 시장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앤절라 킬로렌 CJ ENM(035760) 아메리카 최고경영자)
한류가 큰 성공을 거둔 데는 K콘텐츠가 애초부터 여성 소비자의 관점에서 가려운 곳을 긁어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기존의 글로벌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소외됐던 여성 소비자들이 한류를 통해 문화 소비의 주체가 됐다는 것이다.
19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에 있는 스탠퍼드대 벡텔 콘퍼런스센터 엔시나홀에서는 스탠퍼드 한국학 콘퍼런스 20주년을 맞아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성장한 이유를 짚어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이날 세션은 킬로렌 CJ ENM 아메리카 CEO와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의 K팝 아이돌 ‘엑소’ 멤버 수호, 마르시 권 스탠퍼드 예술사 조교수의 대담으로 진행됐다.
킬로렌 CEO는 “K콘텐츠가 한국적이라면 한국에서만 잘 돼야 했을 텐데 한류는 전 세계에 통했다”며 “한류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여성 소비자 특히 젊은 여성 소비자의 시선으로, 이들을 위해 콘텐츠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짚었다. 그는 단적인 예로 할리우드 생태계에서 생산된 영화·TV쇼·음반을 언급했다. 킬로렌 CEO는 “한류 이전에는 여성은 얼마나 섹시한지, 남자는 얼마나 나쁜 남자인지 등이 중요했다”며 “K팝·K드라마를 통해 여성 소비자들이 이전에는 느낄 수 없던 로맨스 등 새로운 감정을 충족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보수적인 국가로 꼽히는 중동 등에서도 한류가 인기를 끌고 있는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어머니가 한국인인 킬로렌 CEO는 유년 시절을 한국에서 보내면서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눈을 길렀다. 그는 한국 시장만의 특수성의 한 예로 광고 시장을 언급하며 “미국 광고 시장에서 가장 구매력이 높은 층이 남성이라 ‘남성의 지갑(male dollar)’을 노렸다면 한국은 여성의 구매력이 높아 여성에 집중했다”며 “여성의 시선이 중심에 놓이는 것은 세계적 추세”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패널인 수호는 2012년 데뷔해 방탄소년단(BTS)에 앞서 글로벌 진출을 성공적으로 이뤘다. 전 세계 76개 도시에서 투어를 하며 한류의 성장을 목격한 수호는 “요새는 무대 위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한류의 힘을 느낀다”며 “K팝의 매력이 일사불란한 군무인데 소셜미디어 틱톡이나 유튜브에 올라온 댄스 커버 영상만 봐도 K팝은 모두가 함께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일종의 ‘재현 가능한(recreatable) 콘텐츠’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한류는 어떤 한 장르에만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로 확장되는 글로벌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200석을 수용할 수 있는 엔시나홀은 선착순에 들지 못한 이들이 당일 취소로 생기는 좌석을 기다리는 대기 행렬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행사를 주최한 신기욱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은 “객석을 가득 채운 이들을 보면 모두 젊은 세대”라며 “한국학 전문가들이 주였던 과거와 달리 한국을 이해하려는 새로운 분위기”라고 전했다. 참가자들의 국적은 미국·볼리비아·멕시코 등으로 다양해 한류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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