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차 세계대전 당시 발생한 태평양전쟁을 다룬 TV 프로그램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략과 일본의 주력 항모를 침몰시킨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들의 희생 등이 미국의 완승을 이끈 핵심이라는 기존 주장과 달랐기 때문이다.
한 물리학자가 인터뷰에서 주장한 것은 더욱 선명했다. 미국이 필리핀을 뺏기고 진주만 공격을 당하는 등 초반의 열세를 뒤집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배경으로 미국의 앞선 과학기술을 꼽았기 때문이다. 전쟁의 판도를 바꾼 3대 무기로 꼽히는 맨해튼 프로젝트로 탄생한 핵폭탄, 당시 상식을 뛰어넘는 적재량으로 높은 고도로 비행할 수 있는 B-29 전략폭격기, 가미카제 공격을 막아낸 근접신관 등이 미국 과학기술의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이 같은 결과는 과학기술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미 정부의 철학이 트리거로 작용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행정부가 실제 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기댄 곳은 미국의 과학자들이었다. 과학기술을 통해 주축국 대비 열세인 군사기술을 향상하고 미군의 희생을 줄이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이에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였던 버니바 부시를 필두로 과학연구개발국(OSRD)을 창설해 과학 연구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다. 그 결과 전쟁의 판도를 바꾼 3대 무기 외에 수많은 기술들이 개발됐다. 이러한 기술은 전후 미국 특유의 기업가 정신과 어우러져 다양한 가전제품이나 대륙을 넘나드는 민간 항공기 개발로 이어졌다. 과학기술의 진가를 알게 된 미 행정부는 전후 미국의 과학 발전을 통한 경제 번영과 국가 안보를 위해 부시 박사에게 다시 조언을 구했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립과학재단(NSF)을 설립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75년이 지난 현재, 또다시 과학에서 답을 찾고 있다. 첨단 기술 패권 전쟁이 심화되고 있는 이때 과학기술이 ‘위기의 미국’을 구해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 실장을 처음으로 장관급으로 격상했고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저명한 과학자들을 과학기술정책자문위원장으로 선임했다. 당시 바이든 대통령은 “이들은 우리 정부가 하는 모든 일을 과학·사실·진실에 근거하도록 해줄 것”이라며 “과학은 언제나 행정부의 전면에 서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이 같은 행보와 달리 한국의 상황은 한없이 초라하다. 새 정부가 ‘초격차 기술’과 ‘디지털 국가전략’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과학기술 업계에서는 ‘과학홀대론’이 불거지고 있다. 과학기술 컨트롤타워와 구체적인 전략에 대한 로드맵조차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통령실의 군살을 뺀다는 명목으로 과학기술보좌관 자리를 없앴고 정보통신기술(ICT) 산업과 정책을 담당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 자리는 아직도 공석이다.
과학기술을 최전선에 내세우며 삼성전자(005930) 반도체 공장을 가장 먼저 찾은 바이든 대통령의 파격 행보가 과학홀대론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기술 패권 경쟁 시대에 좌고우면하다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한국 경제 발전의 근간이 돼온 우리의 과학기술이 새 정부의 로드맵 어디 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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