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최근 일으킨 민주당 쇄신바람에 핵심은 “팬덤이 아닌 대중정당을 만들겠다”입니다. 박 위원장은 민주당을 포위하고 있는 팬덤의 부작용을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오랫동안 민주당에서 정치를 했다지만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던 팬덤문제를 민주당에서 막 정치를 시작한 박 위원장이 꺼내자 당은 벌집을 쑤신듯 소란스럽습니다.
그동안 팬덤문제에 말 한 마디도 못했던 의원들은 이번에도 팬덤을 직시하기보다 ‘어린애’가86용퇴론을 ‘뜬금’없이 주장한다며 혀를 차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3월 대선 직후 민주당은 비대위를 꾸리며 ‘관리’의 윤호중, ‘쇄신’의 박지현 투트랙 지도부를 꾸렸습니다. 박 위원장의 역할이 쇄신이었던 셈입니다. 지도부의 성화에 그가 “그럼 날 왜 여기 앉혔나”라며 반박한 것도 이유있는 항변입니다. 즉 투트랙 지도부 성격상 이번 박 위원장의 긴급 기자회견이 설령 지도부와 협의가 없었다해도 선거국면에 ‘쌍끌이(중도확장·지지층결집)’전략상 나쁠게 없었습니다.
‘성비위 제명’‘짤짤이’‘3M’‘이모’는 놔두고 “박지현 탓”
오히려 성비위로 제명당하고 ‘짤짤이’로 홍역을 일으킨데다 ‘한국3M’과 ‘이모’교수 발언이 이번 선거에 민주당을 위태롭게 만든 악재중에 악재입니다. 그런데도 ‘짤짤이’의원의 징계는 선거이후로 미뤘고, 이모 교수발언을 한 의원은 선대위 대변인직을 맡았습니다. 그 와중에 민주당 지도부는 박 위원장에게 불란을 일으켰다며 쌍심지를 켜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습니다.
일부 의원들이 박 위원장의 주장에 동의하며 지지하는 듯 하지만 역시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정치 경력이 짧아 잘 모른다’식으로 ‘어른’인척 하고 있습니다. 만약 민주당이 패배할 경우 모든 책임을 박 위원장에게 떠넘기겠다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박지현, 윤호중 사과에도 다시 대립…28일 밤 극적 화해
박 위원장도 위기감을 느꼈을 까요. 지난 27일 결국 공개 사과를 했습니다. 페이스북을 통해 “당 지도부 모두와 충분히 상의하지 못하고 기자회견을 한 점을 사과드린다” “일선에서 열심히 뛰고 계시는 후보들에게 정중하게 사과드린다” “마음 상하셨을 윤호중 위원장께도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다만 5시간 30여분 만인 이날 오후 8시26분께 페이스북을 통해 박 위원장은 “인천 집중 유세에서 윤호중 공동비상대책위원장에게 공동유세문을 발표하자고 요청드렸으나, 결과적으로 거부당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제가 제안한 공동 유세문에는 ‘더 젊은 민주당, 더 엄격한 민주당, 약속을 지키는 민주당, 폭력적 팬덤과 결별한 민주당, 미래를 준비하는 민주당’ 등 5대 쇄신 과제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기성 정치인들이 새 희망을 가꾸려는 청년 정치를 지원하기 위한 시스템을 철저히 갖추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어 “윤 위원장과 협의를 진행했으나 결과적으로 거부를 당했다”며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는데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연출하는 것은 국민 앞에 진실하지 못한 자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인천 집중 유세에 참석하지 못하고 차를 돌렸다”고 전했습니다. 윤 위원장 측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박 위원장이 ‘자리 요구하더라’며 맞받아쳐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듯 했습니다. 다만 28일 2시간여 비대위 긴급회의를 통해 두 위원장은 “향후 이런 일이 없이 손을 붙들고 단합해서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매진하겠다”고 극적화해를 했습니다.
‘관리’의 윤호중·‘쇄신’의 박지현…투트랙 전략 회생할까
문제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당대표인 비대위원장이 지도부와 협의없이 사과 기자회견을 한 게 문제일까요. 도발적으로 86용퇴론을 주장한 게 문제일까요. 이게 본질은 아닐 겁니다. 박 위원장의 쇄신은 ‘투트랙 쌍끌이 선거 전략’으로 외연확장에 도움이 될 수 도 있는 기회일 수 있는데 이렇게까지 갈등으로 비화하게 되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86그룹이 민주당 의원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형편에 그들의 퇴진은 수사적 이야기에 그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난 한주 민주당이 들끓는 것은 박 위원장이 ‘팬덤’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당 안팍에선 이재명 민주당 총괄선대위원장의 지지층인 ‘개혁의 딸(개딸)과 양심의 아들(양아들)’ 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지세력인 ‘문파’를 언급하며 팬덤정치의 유·무해성을 따지고 있지만 민주당은 그보다 깊은 ‘팬덤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문 전 대통령의 책 ‘운명’을 옮겨오겠습니다.
“대통령은 수사가 시작된 후로는 두문불출, 일체 외출을 안하셨다. 언론의 카메라에 늘 신경을 쓰셨다. 그런데 봉화산으로 산책이라니, 그리고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지셨다니, 게다가 상태가 엄중하다니…불길한 생각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중략) 여사님의 오열과 통곡 앞에서 나도 나를 가누기 어려웠다. 고통스런 일이었다 실신했다 깨어났다를 반복하던 여사님께서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하신 후에 동의를 했다. 인공심장 박동기를 제거했다. 2009년 5월23일. 오전 9시30분이었다. 그 분을 떠나 보냈다”(문재인, 운명 중)
민주당 지지층에 2009년 5월23일은 상처이며 운명입니다. 한 차례 대선에서 다시 진 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촛불이 타올랐고 그렇게 5년전 문 전 대통령은 집권합니다. “다시는 우리 대통령을 잃지 않겠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이제는 울지말자” “이번엔 지켜내자” 위기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노 전 대통령을 잃어버렸다는 트라우마가 반복됐고, 이성보다 감성이 더 크게 작용하는 팬덤정치가 민주당 저변에 퍼졌습니다.
盧 서거후 두번의 대선패배…정당에 침투한 팬덤
누군가는 팬덤정치의 시작을 노사모에서 찾기도 합니다만 노사모는 정치적 역할을 하면서도 스스로 정당으로 변모하거나 기존 정당에 편입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노사모 회원 대다수는 팬클럽의 속성을 유지하면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 역시 자신의 지지자들인 노사모 회원들을 열린우리당(민주당 전신)에 끌어들이거나 혹은 노사모를 토대로 한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즉 노 전 대통령은 팬덤을 참여민주주의의 일환으로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 동력을 정당이라는 제도적 기구 속으로 내재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을 잃고 나서부터 팬덤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팬덤이 정당내로 깊숙하게 파고들었습니다. 그 기준점을 민주당 안팎에서는 2015년 온라인 당원모집이 결정적인 계기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방문 또는 우편·팩스로만 낼 수 있었던 입당 원서를 온라인으로 받기 시작한 게 이 시기 즈음부터입니다. 특히 2016년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과정에서 호남세력이 떨어져 나갔고 ‘문재인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 공백을 메우며 ‘문파’가 대거 민주당에 들어오며 팬덤이 정당을 좌지우지하게 됐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인 2017년 6월 당시 추미애 대표가 2018년 지방선거 공천 경선에 권리당원 투표를 50% 반영하겠다고 결정하고 ‘100만 권리당원 운동’을 펴면서 당원 모집 경쟁은 더욱 불붙었고, 2017년 6월 24만명이던 민주당 권리당원은 6개월 만에 15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팬덤은 각종 당내 선거에서 마다 영향력을 발휘했고 그런 까닭에 정치적 효능감까지 높아졌습니다. 팬덤이 밀어올리면 수석 최고위원으로 당선이 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는 ‘개딸과 양아들’이 대거 입당을 했습니다. 팬덤의 층위가 또 한번 달라졌지만 기본 특성은 ‘노무현처럼 잃지 않겠다’는 겁니다.
팬덤에 끌려가는 정당…팬덤에 포위된 정치인
팬덤정치가 나쁘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한국 정당들이 이념적으로 편향됐고, 시민사회 내의 요구를 충분히 수용할 만큼 개방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팬덤정치가 외부충격 효과를 가져온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당의 주인이 되면서부터 정치인들이 팬덤에 끌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박 위원장에 진정성 담긴 고백과 자기성찰에도 강성 지지층에서 쏟아내는 저주에 가까운 비토와 이에 눈치를 보는 또 다른 지도부의 모습이 현재 민주당이 팬덤에 장악된 포위된 정당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팬덤이 주인이 된 민주당을 박 위원장은 바꿀 수 있을까요. 선거가 끝나면 박 위원장에게 어떤식이든 책임을 물으려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노 전 대통령을 보낸 뒤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스스로 대선에 두번 출마해 팬덤의 세례를 받았던 문 전 대통령은 팬덤정당을 바꾸겠다는 박 위원장을 만난다면 무슨이야기를 하게 될까요. 퇴임 직전 한 인터뷰에서 문 전 대통령은 “진정한 지지는 (세력을) 확장하게 하는 지지여야 한다. 배타적이고, 다른 사람이 거리를 두게 하는 지지는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위한 지지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2009년 상처 이용해 ‘추앙’종용…차기 리더십 될 수 없어
문 전 대통령의 메시지 마냥 강성지지층은 이제 이성을 찾아야 합니다. 그 전에 그들의 트라우마를 박 위원장이 위로해주며 치유를 해줘야 합니다. 대중정당으로의 변모는 누군가를 용퇴시키고 팬덤을 와해시키겠다는 선언적 발언 보다 이성을 찾을 수 있게 길을 터줘야합니다. 박 위원장 뿐만이 아닙니다. 차기 민주당의 리더십은 교묘하게 2009년의 상처를 조장 이용하며 자신을 ‘추앙’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팬덤을 위로하고 이성을 찾게 큼 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민주당의 쇄신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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