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최첨단 기술로 총성 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데 국내 산업 기술 유출 사건 가운데 절반가량은 여전히 집행유예나 벌금형인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있다. 아직도 산업 기술 유출 사건 5건 가운데 1건은 무죄판결을 받는 상황이다. 최근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양형 기준을 개선했지만 여전히 미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와 기업의 운명을 가를 산업 기술 유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양형 기준의 현실화, 전문가 자문단 구성 등 현실적인 대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해 12월 6일 지식재산권 범죄 양형 기준을 수정하고 올해 3월 1일부터 시행 중이다. 바뀐 양형 기준의 핵심은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회복이 있었는지 여부다. 기존에는 피의자가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한 경우에 주안점을 뒀다. 바뀐 양형 기준은 공탁 등 실제로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했을 때 형을 줄여주는 감경 요인으로 본다. 합의 과정에서 피해자를 괴롭히거나 부당한 압력을 가한 경우 형을 늘리는 가중 요소로 본다.
문제는 양형 기준이 여전히 사후약방문처럼 사후 조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법조계에서는 예방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산업 기술 유출 사건이 점차 지능화·조직화되면서 국가 경제에 큰 파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양형 기준이 대폭 강화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산업 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2019년 8월 개정돼 처벌 수위를 높인 데 맞춰 양형 기준도 함께 강화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개정 산업기술보호법은 해외로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할 경우 형사처벌 하한선을 3년으로 못 박았다. 절취·기망·협박 등 부정한 방법으로 기술을 유출하면 최고 15년형에 처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대법원 양형 기준은 국외 유출의 경우 1년~3년 6개월, 국내는 8개월~2년에 불과하다. 그나마 실형이 선고되는 사례는 찾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1심 판결이 내려진 58건 가운데 실형 선고는 단 3건에 불과했다. 절반에 가까운 25건(43.10%)은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8건은 벌금(재산형)이었다. 반면 무죄 선고는 12건에 달했다. 5건 가운데 1건은 죄가 없다는 판결이 내려진 셈이다. 지난해 법무부도 양형위원회에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해 2019년 법 개정으로 상향된 법정형을 반영하고 처벌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양형 기준 상향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보낸 바 있다.
손승우 한국지식재산연구원장은 “협력사가 핵심 장비를 통째로 만들어 유출하거나 중간에 둔 컨설팅 업체에 취업하는 방식으로 인력을 빼내는 등 범행이 교묘해져 (검찰이) 범죄 고의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며 “재판부가 산업 기술 분야에 대한 이해가 낮은 데다 과거 판례에 의존하다 보니 실제 선고 형량이 낮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법적 형량은 높은 데 반해 실제 양형에서는 기술적 가치를 현실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범죄자가 대가 등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형량을 현실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덧붙였다. 낮은 처벌 수위가 오히려 범죄를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또 국가핵심산업기술은 다른 분야보다 사안이 더 막중함에도 법원 양형 기준에서 산업 기술 침해 행위와 일반적인 영업 비밀 침해 행위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아울러 해외로 기술이 유출되기 직전 피의자가 기소되는 사례가 대부분인데 이 경우 ‘기술 가치’ 산정이 어려워 피해 자체가 경미한 경우로 취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법조계에서는 처벌 수위 강화는 물론 검찰·법원에서 기술 가치 또는 피해액을 산정할 수 있는 전문 자문단 구성 등 다양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정창원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조직·계획적 범죄로 실형이 선고되는 사례가 있지만 대부분 초범이라거나 실제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등이 선고됐다”며 “유출된 기술의 가치, 영업 기밀성 등을 재판부가 정확히 인식하고 선고하기 위한 피해자 진술 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존 산업 기술 유출 사건 재판에서 의견서 제출 등이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참고인 등 증인이 법정에서 진술을 할 수 있으나 범위가 제한될 가능성이 있다. 산업 기술 유출 사건의 피해자가 대부분 기업인 만큼 프레젠테이션 등 기술 가치를 제대로 설명할 재판 절차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는 또 “기술심의관처럼 재판부에 기술적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전문가 배치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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