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오민애가 30년 무명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연기를 향한 순수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길을 걷던 그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연기를 포기해야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때 영화 '윤시내가 사라졌다'를 만나게 됐고,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배우상이라는 쾌거까지 이뤘다.
'윤시내가 사라졌다'(감독 김진화)는 20년간 윤시내의 이미테이션 가수 연시내로 활동해온 순이(오민애)가 윤시내 실종으로 일자리를 잃을 뻔한 상황에 처하자 관종 유튜버인 딸 짱하(이주영)와 윤시내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순이는 동경하는 윤시내의 그림자를 밟으며 자존감을 채우는 인물이다. 최대한 윤시내와 비슷할수록 자신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그는 짙은 화장과 가발, 화려한 무대 의상 안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던 중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오민애는 극의 중심에 있는 순이가 매력적이라고 느껴져 작품을 선택하게 됐다. 주연으로 장편 영화를 쭉 끌고 갈 수 있다는 점은 무거운 책임감이 들지만, 도전적이었다. 게다가 이미테이션 가수라는 독특한 설정을 지닌 캐릭터라 더욱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나 때문에 영화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작가가 써 놓고 감독이 의도한 대로 안 되면 어쩌나'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전 긍정적인 성격이라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고 노력했죠. 여태까지 제가 보여주지 못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욕심이 났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촬영에 들어가게 된 오민애는 윤시내 모창이라는 거대한 벽을 마주하게 됐다. 평소 모창을 즐겨 하는 오민애는 조금 더 집중하면 윤시내 모창도 가능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막상 연습을 하려고 보니 불가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아찔해진 그는 완전한 모창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른 쪽으로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가수가 아니다 보니 특별한 교육을 받을 줄 알았는데, 감독님이 연락이 안 되시더라고요. 그 사이에 저 혼자 연습했어요. 일단 윤시내 선생님의 포인트를 살펴보려고 했어요. 일단 동작에서 골반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상체가 왔다 갔다 하세요. 팔을 움직이고 펌핑을 하시는데, 워낙 에너지를 많이 쏟으시니까 몸도 비트시더라고요. 힘들 때 머리를 흔드시는 등의 특징을 잡았어요."(웃음)
윤시내와 비슷한 비주얼을 구현하기 위해 고민도 많았던 오민애는 실제로 윤시내와 마주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후 윤시내와 만난 오민애는 있는 그대로를 흡수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가발, 화장법부터 조곤조곤한 말투까지 윤시내의 모습을 하이에나처럼 흡수한 오민애는 폐를 끼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초반, 순이가 윤시내를 따라 할 때는 가발도 쓰고 짙은 화장을 해요. 이후 가발을 벗고 화장을 지운 후 진짜 순이의 얼굴이 나올 때랑 대비되죠. 순이는 화장도 안 하고 새치 염색도 안 하거든요. 이렇게 나와야 대비가 강렬하게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가발을 벗는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죠."
오민애는 순이가 윤시내를 진심으로 흠모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20년 동안의 이미테이션 가수 생활이 가능했을 거라고 말했다. 오민애는 이런 순이의 마음이 대사에 절실히 쓰여 있어 몰입하기 편했다고 회상했다. 대본을 그대로 표현하기만 하면 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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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에 순이가 진심으로 윤시내를 좋아하고 있구나가 담겨 있어서 그 마음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죠. 이걸 제가 진정성 있는 언어로 표현한다면, 더 자연스러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좋아하는 걸 표현하는 게 아니라, 제가 좋아하면 돼요. 마음속으로 '윤시내 선생님을 진짜 사랑하고 품고 있어야겠구나' 싶었어요."
자신의 얼굴을 한 순이가 마침내 윤시내와 마주한 장면에는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응축돼 있다. 순이가 혼수상태에 빠진 1세대 윤시내 이미테이션 가수에게 윤시내의 곡 '그대에게서 벗어나고파'를 열창하고, 이 모습을 윤시내가 따뜻하게 바라보는 장면이다.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윤시내 앞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 나서겠다고 다짐하는 순이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순이가 윤시내를 직접 마주했음에도 누워있는 나의 동료를 위해 노래를 부르잖아요. 처음에는 동료를 위하는 마음이 들어간 거예요. 그리고 반복적으로 '그대에게서 벗어나고파'를 외치는데, 순이는 순간 '아 이제 내가 윤시내에게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기에 윤시내가 눈앞에 있어도 담담할 수 있었던 거고요. 묵혀 뒀던 감정을 비워낸 거라고 생각했어요."
"영화라는 게 참 이상해요. 저는 배우니까 연기로 주어진 상황에 책임을 다하는 건데, 이후에 시너지들이 생겨요. 이 장면을 관객이 봐줬을 때 비로소 생명이 생기고 에너지가 만들어져요. 관객들이 이 장면을 좋아하고 감상평을 주는 걸 보고 저도 다시 한번 돌이켜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게 됐어요. 유기적으로 흐르는 매력이 있습니다."
오민애는 '윤시내가 사라졌다'를 통해 제23회 전주국제영화상에서 배우상을 품에 안는 쾌거를 이뤘다. 배우를 포기해야 될까라는 고민의 기로에 서 있던 시점에서 받은 상이라 더욱 뜻깊다고. 그는 아이 교육비 문제로 힘들어하던 중 시어머니가 직장 생활을 제안했다고 털어놨다. 고민 끝에 3년만 배우로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시어머니를 설득했다.
"이상하게 3년이라고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일이 들어오더라고요. 독립, 단편 영화들이 계속 들어왔는데, 그 작품들이 영화제에 가고 선순환 되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거예요.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변에 지인과 후배들이 항상 절 안타깝게 보곤 했어요. 제가 중간에 어려운 일들이 많아서 카드 영업도 했거든요. 그때 절 바라본 후배들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다들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거예요. 상을 받는데 그 친구들이 생각나더라고요. 내가 지금 잘 되고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무명의 시간을 걷고 있는 친구들에게 용기가 되고 싶습니다."
배우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오민애에게 '윤시내가 사라졌다'는 특별한 작품으로 남을 거다. 30년 동안 무명 배우로 살았던 그는 그간의 설움과 아픔을 딛고 큰 위로를 받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다. "이 에너지를 발판 삼아 이제 막 시작하는 이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는 오민애의 제2의 인생은 지금부터다.
"건강 관리 열심히 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작업하고 싶어요. 지금 만족하기 때문에 더 확장하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나무 씨앗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듯 저도 또 한 단계 성장하면서 배우로 좋은 열매를 맺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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