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5일 0시. 하루 평균 약 4000명의 인력이 투입됐던 서울 강동구 둔촌동 ‘둔촌주공 재건축(올림픽파크 포레온)’ 사업장의 공사가 멈췄다. 시공사업단(현대건설·HDC현대산업개발·대우건설·롯데건설)은 공사 현장에서 모든 인력과 장비를 철수시켰으며 ‘유치권 행사 중’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공사장 곳곳에 내걸고 공사장 전체에 대한 전면 출입 통제에 나섰다. 시공단이 사업장에 대해 유치권을 행사함에 따라 허가받지 않은 이는 사업장을 출입하거나 점유할 수 없게 됐다.
이후 약 두 달이 지난 지금. 상황은 마치 여의도 정치권 동향을 보듯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조합은 지난 6월 2일 서울시 중재안을 사실상 전격 수용하며 반전의 계기를 만드는 듯했다. 중재안은 시공단의 요구대로 공사비를 증액하고 공기 연장에 따른 비용 추산을 제 3자(SH공사 등)에게 맡기는 조항이 담기는 등 조합이 쉽사리 따르기 힘든 내용이었다. 조합이 한 발짝 다가서자 시공단은 6월 9일 이달 중 예정됐던 타워크레인 해체 일정을 연기해 화답했다. 이때만 해도 다수의 언론에서는 극적인 사태 해결 가능성이 대두됐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6월 13일, 둔촌주공 사업 대주단이 조합에게 빌려준 사업비의 대출 만기 연장을 거부하며 사태는 다시 반전을 맞는다. 이후 둔촌주공 조합 내에서는 비상대책위원회 격인 ‘둔촌주공 정상화위원회’가 이전부터 진행하던 현 집행부 해임을 본격 추진하고 조합 내부 문건을 대대적으로 폭로한다. 내부 분열이 심화되며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는 중이다. 조합원만 약 6000명에 달하는 둔촌주공 재건축 사업. 사업이 표류하면 서울 주택 공급에, 분양 물량에, 무엇보다도 일반 조합원들의 재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울경제가 공사 중단 이후 약 두 달 동안의 둔촌주공 분쟁·협상 과정을 정리했다.
공사 중단 후 한 달…끝없는 갈등
시공단이 공사 중단을 예고한 것은 공사중단일로부터 약 한 달 전인 3월 14일이다. 이날 시공단은 조합, 강동구청과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둔촌주공 재건축 조합의 사업 추진 지연에 따른 공사중단 예고 안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냈다. 이에 조합은 시공단을 상대로 서울동부지법에 공사계약 무효확인 소송을 같은 달 21일 제기했다. 이후 4월 15일 실제로 공사가 중단되자 조합은 공사 중단이 10일 이상 지속될 경우 현 시공단과의 계약 해지를 추진하겠다며 추가로 맞불을 놓았다. 하지만 이는 서울시 중재가 시작되면서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시공단과의 계약 해지까지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그동안 갈등을 빚어온 2020년 6월 공사비 증액 계약의 법적 토대가 된 과거 조합 총회에 대한 무효화는 이뤄진다. 조합은 공사 중단 바로 다음날인 4월 16일 총회를 열어 "2019.12.07. 임시총회 ‘공사계약 변경의 건’ 의결 취소의 건'을 통과시켰다. 전 둔촌주공 조합장 최 모 씨는 이 총회에 기반해 이듬해인 2020년 6월 25일 공사비를 기존 2조 7049억 원에서 3조 2293억 원으로 5244억 원 증액하는 내용의 계약을 본인에 대한 해임발의안이 나온 당일 체결했다.
이후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시공단은 5월 17일 일부 타워크레인의 해체를 시작한다. 통상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크레인이 한번 본격적으로 해체되면 재설치까지 최대 9개월 가량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월 27일, 그동안 양측의 의견을 조율해온 서울시가 조합과 시공단에 중재안을 제시하지만 불과 나흘 뒤인 5월 31일 시공단이 이를 전면 거부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둔촌주공 사태 해결의 실마리는 없는 듯했다.
조합, 중재안 수용하며 ‘터닝 포인트’ 만들어
하지만 그로부터 이틀 뒤인 6월 2일. 둔촌주공 조합은 서울시에서 내놓은 중재안에 대한 사실상의 전격 수용 의사를 밝힌다. 서울시가 제시한 중재안은 총 10개 조항이 담겼었다. 핵심은 △조합과 시공단이 기존 계약의 유·무효를 더 이상 논하지 않고 공사비 약 3조 2000억 원에 대한 한국부동산원의 재검증을 거쳐 계약을 변경 △시공단은 조합의 마감재 요구와 관련해 미계약 부분을 조합과 협의해 수용하되 증액분은 조합이 부담 △조합은 분양 지연 및 공사 기간 연장에 따른 손실 등을 수용 △조합은 시공단에 제기한 소송을 취하하고 올해 4월의 계약 무효 총회 또한 철회한다는 내용 등이다. 사실상 조합이 쉽게 수용하기 힘든 내용이 적지 않았다. 이를 조합이 받아들이며 일각에서는 사업 정상화에 대한 신호탄이라는 기대감 섞인 해석이 나왔다.
실제로 약 일주일 만인 6월 9일, 시공단은 이달 중으로 예정됐던 타워크레인 해체 일정을 내달 중으로 전격 연기했다. 시공단은 이날 입장문에서 “시공사업단은 협의를 거쳐 7월 초까지 크레인해체의 논의를 연기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했다”며 “서울시 중재 및 조합의 진행상황 검토 이후 일정을 협의 및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시공사업단 또한 둔촌주공재건축 사업의 정상화를 통해 조합원들의 손실이 최소화 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모두 한 발짝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정상위’의 해임 절차 착수에 조합 내부 분열 심화
하지만 시공단이 타워크레인 해체를 결정하기 하루 전인 6월 8일, 조합 내부 비대위격인 ‘둔촌주공 정상화위원회(정상위)’가 조합 집행부에 대한 해임 절차 착수를 공식화했다. 숨겨져 있던 내부 분열이 싹튼 것이다. 해임 절차가 개시됐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정상위의 ‘조합 뒤집기’ 시도는 무위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4월 16일 총회 당시 6151명의 조합원 가운데 4822(78.4%)명이 서면 결의 등을 통해 참석하고, 이 중 4558명(94.5%)이 주요 안건에 찬성하는 등 현 조합에 대한 지지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상위 관계자는 9일 서울경제와의 통화에서 “해임 절차에 착수한다고 해서 바로 집행부 해임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며 “상황을 보아가며 절차를 밟아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다음날인 9일 오전 현 집행부에 친화적인 조합 내부 단체 ‘둔촌주공 조합원모임(조합원모임)’이 정상위를 겨냥한 ‘협박 문자’를 전 조합원을 대상으로 보내며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데에 있다. 조합원모임이 보낸 문자에는 △해임 발의서 제출 즉시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해임 발의서를 제출한 명단을 확보 △현금 청산을 포함한 조합원 제명 추진 △사업 진행 방해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및 민형사상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조합 집행부 해임에 동의하는 조합원에게 심각한 불이익을 주겠다며 사실상 위협을 한 것이다.
둔촌주공 조합원모임은 2021년 현 조합 집행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존재하던 조합 내부 단체로 현재 수천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현 조합 자문위원회장을 맡고 있는 조 모씨가 단체 운영을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일 문자는 둔촌주공 조합원모임 사무실 번호로 발송됐다. 이에 대해 조합 집행부 관계자는 “둔촌주공 조합원모임에서 발송한 문자는 일부 조합원이 보낸 것으로 조합 집행부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하다”며 “조합은 문자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둔촌주공 대주단, 조합에 사업비 만기 연장 불가 통보
6월 초만 해도 정상위의 해임 절차 착수 및 조합원모임의 ‘협박 문자’를 계기로 내부 분열이 심화됐지만 서울시 중재를 통한 공사 재개 및 사업 정상화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태의 분수령이 6월 13일 터진다. 둔촌주공 사업 대주단의 사업비 대출 만기 연장 불가 통보다.
둔촌주공 조합은 현재 NH농협은행 등 17개 금융기관 및 PF으로부터 사업비 대출을 받고 있다. 재건축 조합이 지출하는 비용은 크게 공사비와 사업비로 나뉜다. 공사비는 말 그대로 기존 건축물 철거 및 대지 토목 공사, 주거시설·부대시설 건축 공사 등에 소요되는 공사 비용을 통칭하는 용어다. 사업비는 국공유지 매입비 및 현금 청산자의 토지 매입비·외주 용역비·조합 운영비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둔촌주공이 대주단에 진 사업비 대출 규모는 정확히 7000억 원이다.
대주단은 이달 13일 조합에 8월 23일이 만기인 이 7000억 원의 대출액에 대한 만기 연장 불가 통보를 했다. 이에 따라 둔촌주공 조합은 사업비 대출 만기일까지 7000억 원을 전액 상환해야 한다. 현재 둔촌주공 조합원 수는 약 6000명으로 조합원 전원이 1인당 1억 원이 넘는 자금을 약 두 달 안에 구해 조합에 전달해야 조합 단독 변제가 가능하다. 공사 중단이 2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만큼 대출을 추가로 일으켜 기존 대출을 갚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 금융권의 평가다. 사실상 조합이 단독으로 채무를 해소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시공사업단(현대건설·HDC현대산업개발·대우건설·롯데건설)은 조합이 사업비를 홀로 변제하지 못하면 대위변제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시공사업단 관계자는 15일 서울경제와의 통화에서 “대주단이 사업비 대출 만기 연장 불가를 통보한 만큼 기존에 연대보증을 선 시공사업단으로서는 추후 조합이 대출금 변제를 못할 경우 대위변제를 하게 된다”며 “대위변제 후 구상권 청구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합의 단독 채무 청산이 사실상 불가한 만큼 시공단이 대신 변제를 하고, 추후 구상권을 청구해 사업장이 경매에 부쳐지는 시나리오가 가능하게 된 셈이다.
국토부·서울시 합동 점검 결과 유출…"지적 사항 수십 건"
상황이 조합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조합 입장에서의 악재가 17일 또 한번 터진다. 지난달 23일부터 2주 동안 진행된 국토부·서울시 등의 둔촌주공 조합 합동 점검 결과가 유출된 것이다. 이날 정상위는 언론에 본인들이 입수한 서울시 공문 파일을 전면 배포했다. 이 파일에는 ‘확인서’라 표현된 지적·확인 사항 수십 개가 담겼다. 이 중 가장 쟁점이 된 것은 총회 의결의 범위를 넘어선 지출을 한 부분 및 총회 의결을 거치지 않고 예산 지출을 한 부분이다.
정상위 측은 이날 “국토부 조합운영 합동실태점검결과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 등 위반을 다수 적발”했다는 취지의 자료를 각 언론사에 보냈다. 이에 대해 조합은 “마감재관련 비리나 이권개입은 전혀 없다”는 취지의 문서를 배포했다. 쟁점이 되는 해당 사항은 도정법 45조와 관련이 있으며, 이를 위반할 시 2년 이하의 징역형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조합 임원은 도정법 위반으로 1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을 받으면 퇴임 사유가 된다. 국토부·서울시 합동 점검 결과가 사태의 또 다른 분수령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조합·시공단 양측 모두 한 발짝 물러서 협상 나서야”
서울시 중재가 순항하던 가운데 대주단이 대출 만기 연장 불가를 통보하고 조합 내부 분열이 격화된 데 이어 현 조합에 대한 지적사항이 포함된 합동 점검 결과가 공개되며 사태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됐다. 공사 재개를 위한 첫 번째 시나리오는 현 조합과 시공단이 아직 진행 중인 서울시 중재를 통해 합의하는 것이다. 한 정비업계 관계자는 “조합은 시공단을 상대로 한 소송을 취하하고 계약을 무효화 한 총회를 재무효화하는 등 시공단의 요구를 상당 부분 먼저 들어주되 시공단은 연대보증을 통해 사업비 대출 만기 연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면 극적 합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둔촌주공 정상위가 현 집행부 해임 절차에 본격 착수해 조합 수뇌부를 교체한 후 시공단과의 협상에 나서 공사 재개 및 사업 정상화를 이루는 것이다. 다만 사업비 대출 만기가 8월 23일인 만큼 이 경우 조합의 채무불이행 사태는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둔촌주공 재건축 사업은 총 가구 수 1만 2032가구에 일반분양 가구 수만 4786가구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 재건축 사업이다. 사업에 얽힌 이해 관계자가 수만 명에 이른다. 관련 기관도 조합, 시공단, 서울시, 국토부, 정상위, 시공단 협력사 등으로 여러 개다. 그만큼 사태 해결을 위한 방정식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업 정상화는 수천 명에 이르는 일반 조합원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최악의 경우 사업장이 경매에 부쳐지고, 조합원은 일부분에 대한 현금 청산을 받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신한은행 부동산자문센터장을 지낸 고준석 제이에듀투자자문 대표는 “갈등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수천 명에 달하는 일반 조합원과 청약을 바라보고 있는 무주택자들”이라며 “양측이 한 발짝씩 물러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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