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임차인이 소유권 이전 계약을 체결한 뒤에 매수인 몰래 임대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받아 사용했더라도 횡령죄를 적용해 형사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채권양도인이 계약을 불이행한 경우 횡령죄가 성립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기존 판례를 23년 만에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3일 횡령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 경북 안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A씨는 2013년 11월 B씨와 자신의 식당 운영권을 전북 순창 임야와 맞바꾸는 양도계약을 체결했다. B씨에게 식당 임대차 보증금 2000만원을 함께 넘기는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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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A씨는 2014년 3월 B씨 몰래 식당 임대인에게 보증금 2000만원 중 밀린 월세를 뺀 1146만원을 받아 개인적으로 사용해 횡령 혐의로 기소됐다. 1, 2심 재판부는 A씨에게 횡령죄를 적용해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채권양도인인 A씨가 가게를 넘기기 전에 채무자인 건물주로부터 수령한 금전을 임의로 처분할 경우 횡령죄가 성립한다는 1999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례에 따른 결정이다.
그러나 이날 열린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A씨가 임대인에게 채권 양도 사실을 알리지 않은 만큼 보증금의 소유권도 A씨에게 있다는 판단이다. 다수 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채권양도인(A씨)이 수령한 금전의 소유권은 채권양수인(B씨)이 아니라 채권양도인에게 귀속된다"며 "채권양도인이 채권양수인을 위해 금전을 보관하는 지위에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임의로 처분하더라도 횡령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최근 대법원 판례의 흐름은 통상의 계약관계에서 배임죄나 횡령죄의 성립을 부정해왔다"며 "이같은 흐름은 죄형법정주의를 엄격하게 적용하겠다는 태도를 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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