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헬스산업이 미래 먹거리로 떠오르면서 'K-바이오'란 단어가 자주 회자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내 기업의 신약개발 성과는 글로벌 빅파마들에 비해 아직 미미한 편입니다. 1999년 SK케미칼(285130)의 위암 치료제 '선플라'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은 이래 등장한 국산 신약은 34종에 불과할 정도죠. 올해는 상반기가 지나도록 국산 신약 허가 소식이 들려오질 않고 있습니다.
더욱 고민스러운 건 국산 신약이 처음 등장한지 20여 년이 지나도록 상업적 성과를 낸 사례가 드물다는 겁니다. 한 해 처방액이 1억 원 남짓에 불과해 국산 신약이란 타이틀을 무색하게 하거나 아예 품목허가 취소 처분을 받은 사례도 있죠.
그런데 최근 "국산 신약은 돈이 안된다"는 징크스를 보란듯이 깬 주인공이 있습니다. HK이노엔(195940)이 개발해 30번째 국산 신약으로 허가받은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제 '케이캡(성분명 테고프라잔)'입니다. 2019년 3월에 발매된 케이캡은 지난해 원외처방으로만 1096억 원의 실적을 올렸습니다. 원외처방은 외래진료를 본 환자들이 처방을 받아 외부 약국에서 의약품을 구매한 실적을 의미합니다. 원내 처방까지 합치면 실제 매출 규모는 더 커질 수 있겠죠. 단일 제품으로만 한해 1000억 원 이상을 벌어들인 국산 신약은 케이캡이 유일합니다. 국내에서는 한해 1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내는 의약품을 '블록버스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발매 3년차 만에 한해 1000억 원 이상의 원외처방 실적을 내는 초대형 제품으로 성장했으니 국산 신약의 새 역사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케이캡은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에 쓰이는 칼륨 경쟁적 위산분비억제제(P-CAB) 계열의 항궤양제입니다. 위벽세포에서 산분비 최종 단계에 위치하는 양성자펌프와 칼륨이온을 경쟁적으로 결합시켜 위산분비를 억제합니다. HK이노엔의 전신인 CJ헬스케어가 2010년 일본의 벤처기업 라퀄리아로부터 초기 물질을 도입한 후 상업화하기까지 8년 가까이 걸렸다고 합니다. 글로벌 시장으로 눈을 돌리면 일본 다케다의 '다케캡(성분명 보노프라잔)'에 이어 전 세계 두 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P-CAB 계열 신약입니다. 중국, 미국을 포함해 해외 34개국에 기술수출 및 완제품 수출 형태로 진출하는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죠. HK이노엔은 최근 중국 파트너사 뤄신과 함께 케이캡 현지 판매에 돌입했습니다. 중국에서는 '타이신짠'이란 제품명으로 판매된다고 해요.
잘 나가던 케이캡이지만 올 하반기부터는 다소 긴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 만만치 않은 경쟁상대를 맞이할 예정이거든요. 지난해 12월 대웅제약(069620)이 34번째 국산 신약으로 허가를 받은 '펙수클루(성분명 펙수프라잔)'가 주인공입니다. 케이캡과 동일한 P-CAB 계열 항궤양제죠. 최근 의약품의 건강보험급여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약제급여평가위원회를 통과했고, 하반기 발매가 유력시됩니다. 피로회복제 '우루사'로 잘 알려진 대웅제약은 업계에서 소화성 궤양제 시장의 큰 손으로 통합니다. 제약사들은 대웅제약이 과거 '알비스', ‘넥시움’ 등 굵직굵직한 항궤양제를 팔았던 영업 노하우를 집중해 케이캡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고 있죠. 대웅제약이 지난해 말 아스트라제네카와 오랜 기간 이어오던 코프로모션 계약을 종료하면서 넥시움 판매에서 손을 뗀 데다, 알비스도 불순물 검출로 판매가 어려워졌거든요.
HK이노엔도 만반의 준비를 하는 분위기입니다. 기존 케이캡은 정제였는데, 올 5월부터 물없이 입에서 녹여먹는 '케이캡 구강붕해정'을 새로 출시했죠. 알약을 삼키기 어려워하는 환자나 물을 마시기 어려울 때도 쉽게 복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제형을 선보인 겁니다. 위식도역류질환 외에도 위궤양, 헬리코박터파일로리 제균을 위한 항생제 병용요법 등으로 적응증도 넓혀가고 있습니다. 국산 신약 2종이 처음으로 펼치게 될 승부 결과가 벌써부터 궁금해 지네요.
◇‘약 읽어주는 안경진 기자’ 코너는 삶이 더 건강하고 즐거워지는 의약품 정보를 들려드립니다. 새로운 성분의 신약부터 신약과 동등한 효능·효과 및 안전성을 입증한 제네릭의약품(복제약)에 이르기까지 매년 수없이 많은 의약품이 등장합니다. 과자 하나를 살 때도 성분을 따지게 되는 요즘, 내가 먹는 약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려드립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