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대유행과 전쟁을 거치며 치솟던 국제 원자재 가격이 연일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대표 원자재인 유가는 한 달 만에 최저가를 기록했고 ‘경기 풍향계’로 불리는 구리는 16개월 만에 가장 낮은 가격에 거래됐다. 일각에서는 인플레이션이 고점을 찍었다는 신호라는 낙관적 해석도 나오지만 다양한 산업생산의 기반이 되는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글로벌 경기 침체 전망이 더 뚜렷해졌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23일(현지 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국제 유가 벤치마크인 북해산브렌트유 8월 인도분은 이날 배럴당 110.05달러에 마감해 5월 24일 이후 한 달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8월물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역시 전날보다 1.92달러 떨어진 104.27달러에 거래를 마쳐 5월 10일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금속 원자재의 하락 폭은 더욱 컸다. 산업 전반에 쓰이는 구리 선물 3개월물은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이날 톤당 8409달러에 거래되며 전날에 이어 16개월 만의 최저치를 또다시 갈아 치웠다. 3월 4일 기록한 올해 최고가(1만 674달러)와 비교하면 21.2%나 낮은 가격이다. 구리와 비슷한 가격 추이를 보이는 알루미늄·니켈·주석은 이날 마감가가 직전 최고가 대비 각각 35.6%, 50%, 44.5% 하락한 수준이다.
구리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은 2020년 3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공급 감소 우려로 꾸준히 오르다가 같은 해 연말에는 최대 수요처인 중국의 경기가 회복될 조짐에 상승 폭을 더 키웠다. 올 초에는 ‘광물 생산 강국’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공급 감소 우려까지 겹치면서 2년래 최고가를 기록한 바 있다.
원자재 가격 상승세가 2년 만에 꺾인 것을 두고 시장에서는 경기 침체의 신호라는 분석이 나온다. 다양한 산업생산의 기반이 되는 원자재 가격이 하락한 것은 경제 주체들이 침체를 예상하고 생산을 줄이려 한다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은 올 1월 보고서에서 “1970~1980년대에는 ‘유가 파동’처럼 특정 원자재의 공급 충격이 전체 원자재 가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지만 (세계화가 심화한) 1990년대 후반부터는 글로벌 수요와 공급 같은 거시경제적 요소로 원자재 가격이 결정됐다”고 분석했다. 원자재 가격과 거시경제 흐름의 연관성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실제로 미국·유럽 등 선진국의 경기 침체는 이미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독일 베렌베르크은행의 홀거 슈미딩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지금까지 미국과 유럽의 경기 침체 가능성이 높아지는 분위기였다면 이제는 내년 침체 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고 전했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미국의 내년 경기 침체 가능성을 기존 15%에서 30%로 올려 잡았다. 미국 기업의 경기 심리를 반영하는 S&P글로벌의 종합 구매관리자지수(PMI)가 5월 53.6에서 6월 51.2, 유로존에서는 54.8에서 51.9로 각각 떨어졌다는 점도 침체 우려에 힘을 더한다. PMI가 50을 초과하면 경기 확장을, 50 미만이면 경기 위축을 나타나는데 주요국 지수가 50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원자재 가격 하락을 두고 인플레이션이 고점을 찍었다는 예측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하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 장기화 등 공급 축소를 부추기는 요인이 많아 고물가가 단기간에 진정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아직 우세하다. 당장 원유의 경우 증산에 대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소극적인 태도로 공급이 대폭 늘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씨티그룹은 “연말까지 유가가 추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변동성은 매우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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