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경남 사천의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본사 계류장에서는 역사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최초의 국산 초음속 전투기 ‘KF 21 보라매’의 시제기 1호기가 국내 취재진이 보는 앞에서 격납고를 나와 활주로 위를 달렸다. 이르면 이달 하순 첫 비행시험에 돌입하기 위한 마지막 절차다.
일반적으로 전투기의 활주 시험은 주행속도에 따라 ‘램프 주행(시속 약 20~30노트, 1노트=시속 1.852㎞) →저속 주행(30~60노트) →중속 주행(60~80노트) →고속 주행(80~120노트)’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날 기자들 앞에서 시연된 것은 램프 주행 시험이었다. 제조사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고속 주행까지도 문제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앞으로 약 2주간의 활주 시험을 계속 진행해 이상이 없으면 비행 성능 시험 단계에 진입할 예정이다. 즉 이륙할 수 있는 속도인 시속 130노트 이상으로 주행해 활주로를 박차고 창공을 처음으로 날게 되는 것이다.
이날 KAI가 현장에서 연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해당 기업의 고위 관계자는 “얼마 전 KF 21에 탑재되는 엔진을 최대출력 수준까지 올려 엔진런(엔진 점화시험)을 실시하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이어서 “현재 해당 엔진을 시제기들에 장착해 활주 시험이 진행되고 있고 첫 시험비행은 7월 4째주 즈음에 할 계획이며 (시험동에서 진행 중인) 각종 지상 시험들도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개발 청사진은=한국형 전투기를 뜻하는 KF 21 사업은 당초 ‘한국형 차세대 전투기(KF-X)’라는 연구프로젝트명으로 시작됐다. 해당 프로젝트는 2015~2028년 총 8조 8000억 원을 투자해 진행되는 것으로 계획됐다. 세부적으로 보면 2015~2026년 8조 1000억 원을 투입해 체계개발 사업을 진행한다. 해당 체계개발 사업에 성공하면 공대공 무장을 탑재하고 기본 비행 성능을 갖춘 ‘KF 21 블록Ⅰ’이 2026~2028년 40기 양산된다. 이어서 2026~2028년에 7000억 원을 들여 추가 무장(공대지 무장 포함) 시험이 실시될 예정이다. 추가 무장 시험을 마치면 공대공 능력은 물론이고 공대지 공격 능력까지 갖춘 ‘KF 21 블록Ⅱ’가 2028~2032년에 80기 양산된다.
정부와 공군이 확정한 개발 청사진은 KF 21을 ‘F 16+급’ 4.5세대의 ‘세미스텔스기’로 만드는 것이다. 4세대 전투기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미국의 F 16보다 높은 교전 능력 및 비행 성능을 구현하고 적의 레이더에 거의 탐지되지 않는 5세대 스텔스 전투기(미국 F 35 등)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저피탐 능력을 실현하겠다는 뜻이다.
◇미래형 전투기로 진화 가능성=서울경제 취재 결과 공군은 여기에 더해 ‘5.5세대 이상급’으로 KF 21을 진화 개발하는 방안 검토를 최근 개시했다. 군의 한 소식통은 “공군이 KF 21을 기반으로 사실상 5.5세대급 이상의 전투기 개발 사업의 타당성이 있는지 검토하기 위해 연구 용역을 준비 중”이라며 “세미스텔스를 넘어 완전한 스텔스 성능을 구현하고 무인 편대기와 합동작전을 펼 수 있는 능력 등을 갖춘 전투기 개발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공군이 연구 용역 결과 해당 개발에 타당성이 있다고 결론을 내릴 경우 이르면 2026~2028년 이후 ‘KF 21 블록 Ⅲ’ 사업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혹은 KF 21의 기체형상 및 기반기술을 바탕으로 동체를 다소 키운 한국형 차차세대 전투기(KF-XX) 사업으로 추진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또 다른 소식통은 “KF 21은 기존 스텔스 전투기들에 매우 근접한 수준의 저피탐 성능을 낼 수 있도록 개발 중이기 때문에 4.5세대라기보다 5세대기에 더 가까운 4.7세대 전투기라고 봐야 한다”며 “일부 도료, 소재 기술을 개선하고 일부 외장 장비를 내장한다면 5세대 플러스 알파급 이상으로 충분히 진화할 수 있다”고 전했다.
◇사업 현주소는=현재는 체계개발 사업 단계가 진행 중이다. 특히 ‘블록Ⅰ’ 전투기 몸체를 제작하기 위한 기반기술은 확보돼 지난해 4월부터 시제기들이 연이어 출고됐다. 시제기 생산 물량은 총 8대다. 이 중 6대는 실제로 지상을 활주한 뒤 하늘을 날게 될 비행시험용 시제기다. 나머지 2대는 시험건물 내에서 실제 비행 상태와 유사한 하중압력 등을 견디는지를 가늠하는 구조시험 및 전기체시험에 쓰이는 시제기다. 비행시험용 시제기 중 1~5호기는 지난해 4~5월 완성돼 출고됐다. 마지막 6호기도 이번 주에 조립 막바지 공정인 외부 도장을 마쳐서 사실상 비행용 시제기 1~6호기가 모두 출고 완료된 상태다. 구조시험 및 전기체시험용 시제기 2대는 이미 제작돼 사천기지 내 KAI 구조시험동에서 각종 테스트를 받고 있다.
KF 21 개발 사업의 시험 평가는 지상 시험과 비행시험의 두 가지로 구분돼 실시된다. 방사청 관계자는 “KF 21 체계개발 사업은 착수 직후 현재까지 약 6년 6개월간 전체 일정의 62% 정도 진행됐으며 앞으로 (블록Ⅰ사업 시한 완료까지) 남은 4년여간 주로 시험 평가에 집중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 중 비행시험은 이달 시작돼 2026년까지 총 2000여 소티(소티=항공기 출격 횟수) 이뤄지는 것으로 계획돼 있다. 비행시험은 공군 조종사 2명, 공군 예비역 파일럿 출신의 KAI 시험조종사 2명이 분담한다.
하이라이트는 이달 네 번째 주에 개시될 첫 비행시험이다. 첫 비행의 주인공은 시제 1호기다. 공군 조종사가 조종간을 잡고 약 30~40분가량 하늘을 날게 된다. KAI의 또 다른 관계자는 “첫 시험비행에 나선다는 것은 동체와 주요 장비를 비롯한 전투기 체계의 기본 성능과 안정성을 담보하는 기반기술이 사실상 완성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향후 숙제는=KF 21 개발 사업을 총괄 주관한 국방과학연구소(ADD)와 KAI 등은 블록Ⅰ의 기반기술과 주요 인프라는 거의 다 완성해 확보했다고 자신하고 있다. 이어질 블록Ⅱ 사업도 무장 추가를 위한 국내외 협력사들과의 협업이 잘 이뤄지고 있어 기존의 계획 일정에 차질은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문제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불거진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다. 국내외에서 급등한 물가 여파로 KF 21 사업도 원자재와 인건비 등의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체계개발 및 추후 양산 비용이 최대 20% 이상 오를 수 있다는 추측도 나온다. 정부의 예산이 빠듯한 상황에서 사업비가 크게 오르면 양산 대수가 줄어들거나 사업 일정이 지연될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해 한 사업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와 글로벌 공급망 문제,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원자재 비용이 상승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조만간 최종 비용이 확정될 예정인데 인상 여지를 최소화하도록 협력 업체들과 논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 F 35 전투기도 최초 1호기를 제작할 때에는 양산 비용이 대당 1억 달러를 넘었으나 이후 대량생산이 되면서 규모의 경제 효과가 발생해 10여 년에 걸쳐 생산 단가가 절반 이하로 낮아졌다”고 말해 비용 상승으로 인한 KF 21의 양산 물량 축소는 없을 것임을 암시했다.
사업 파트너인 인도네시아와의 원활한 협력도 아직 남은 숙제다. KF 21 개발비 8조 8000억 원 중 60%는 우리 정부, 20%는 인도네시아, 20%는 KAI 등 국내 업체가 분담하도록 계약이 맺어져 있었다. 문제는 인도네시아가 자국의 경제난 등을 이유로 분담금 중 상당액을 연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국방부와 방사청은 분담금 연체 문제를 풀어가기로 인도네시아 측과 협의가 잘 풀려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가 끝까지 연체금을 지불하지 않을 경우 6대의 비행용 시제기 중 인도네시아에 주기로 한 1대(시제 5호기)를 해당 국에 제공하지 않겠다는 게 우리 당국의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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