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 카타르 도하. 우루과이라운드의 뒤를 이어 새로운 세계 무역 질서를 만들기 위해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제4차 각료회의 협상장에 입직 3년차인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 사무관이 실무자로 참석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개발도상국 지위였던 대한민국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몇 달을 준비했지만 막상 협상 테이블에 앉으니 한계를 느꼈다. 선진국은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어서인지 준비가 잘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본인 스스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방법에 대해 훈련이 돼 있지 않았다는 자괴감이 컸다.
귀국하자마자 유학을 결심하고 휴직을 신청했다. 고참 사무관에게 주어지는 학위 연수 기회를 얻기 위해 몇 년을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듬해부터 6년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수학하며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땄다. 유학 도중 휴직 기간(5년)을 넘기면서 면직 처리됐다. 2008년 박사 학위를 받자마자 메릴랜드대 교수로 부임해 왕성한 연구 활동을 벌인 후 2016년 귀국, 서강대 교수로 일하다 2020년 모교인 서울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수형(46)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공직을 박차고 나와 경제학자로 변신하기까지의 20년 여정은 이렇게 요약된다.
최근 서울대 관악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한국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에 비해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아 마치 신호등 교차로에 꽉 막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면서 “국민을 위한 각종 제도를 만들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어 고시 공부를 시작했고 공무원이 됐지만 너무 짧게 끝났다”고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작고한 김태성 전 서울대 교수를 떠올렸다. 그는 “대학 신입생 때 김 교수님이 지도교수셨는데 고시 준비를 할지, 공부를 할지 결정하지 못하자 “고시에 먼저 붙어 공무원이 되고 나서 제대로 공부하면 된다. 학업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조언해주셨다”면서 “김 교수님의 조언대로 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학점을 포기하지 않고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 교수는 1999년 제42회 행정고시 재경직에 차석으로 합격했다.
고교 재학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대학도 수석 졸업한 이 교수는 공부라면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미국 유학 시절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그는 유학하면서 깨달은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운동과 체력의 중요성이다. 스탠퍼드대 경제학과 석·박사 통합 과정은 입학 1년차에 탈락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공부 시간이 늘 모자랐는데 유럽에서 온 동료들은 시간 날 때마다 운동을 하면서도 학업에서 뒤처지지 않아 부러웠다고 한다. 이 교수는 “한국 학생들의 근시 비율이 90%를 넘는데 밖에서 뛰놀 나이에 실내에서 인공조명을 받으며 공부만 해서 그렇다”면서 “어릴 때부터 운동을 습관처럼 해 정신적·신체적으로 건강해야 무슨 일이든 끈기를 갖고 도전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두 번째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이 교수는 토론식으로 이뤄지는 대학원 강의에서 자신이 아는 것을 남에게 전달하고 말이나 글로 의사소통을 매끄럽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언어 문제도 있지만 한국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남에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소극적인 편”이라면서 “돌이켜보니 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관련해 프로페셔널한 수준에서 배운 것이 없다”고 회고했다.
마지막으로 네트워킹(협업) 능력이다. 현대 사회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도움을 주고받고 함께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데 한국은 구조적으로 경쟁 사회라 ‘친구가 잘되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 협력적 사고가 부족하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친구가 잘되는 것이 나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바탕으로 협업하고 네트워킹하면서 같이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됐다”며 “학교에서 협업 능력을 키워줘야 하는데 말로는 다양성을 중시한다고 하면서 아직도 아이들을 줄 세우기하고 경쟁시키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2008년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 학위 논문 중 최우수 논문에 주어지는 ‘랜도상’을 받고 졸업했다. 졸업논문 제목은 ‘동질혼에 있어서의 배우자에 대한 선호와 인적 네트워크의 중요도’였다. 결혼 정보 업체 회원 2만여 명을 대상으로 한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결혼 정보 서비스가 동질혼 정도를 심화시킨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뒤집었다. 결혼 정보 서비스를 이용하면 교육 수준에 따른 동질혼 정도가 낮아지고 세대 간 빈곤 세습 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혔다. 이 교수의 논문은 국내 결혼 정보 업체가 실제 경영에 활용하겠다고 발표했을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이 교수는 메릴랜드대 교수로 8년간 재직하며 참신한 주제의 논문을 다수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칠레의 대학 입시 제도를 분석해 진학을 위한 탐색 비용과 계층 간 불평등 문제를 고찰했고 온라인 만남에서 정보의 비대칭성이 매칭 성사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구인·구직 시장의 적용 가능성을 탐색했다. 성형수술과 노동시장의 차별 문제, 동남아시아 결혼 이주 여성 문제 등도 연구 주제로 다뤘다.
경제부처 공무원 출신 경제학자로서 이 교수는 경제학계와 정부 실무자 간 가교 역할을 자임한다. 특히 통계학을 기반으로 경제·사회 문제를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응용계량경제학자인 만큼 데이터를 토대로 의미 있는 경향을 발견해 정책의 효과성과 시장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생각이 반영된 대표적 연구가 지난해 발표한 ‘코로나19에 따른 서울시 재난긴급생활비의 소비 효과’다. 2020년 상반기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지원금을 소득에 따라 선별 지원하는 것이 옳은지, 소득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는 것이 맞는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정책 시행에 따른 효과를 놓고도 논란이 여전하다.
이 교수는 우석진 명지대 교수팀, 서울연구원과 함께 서울시의 재난긴급생활비 지원 정책이 소비 효과를 얼마나 냈는지를 빅데이터와 통계 기법을 이용해 측정했다. 서울시 거주자 중 실험군인 중위소득 이하 그룹이 대조군인 중위소득 이상 그룹에 비해 지원금을 받은 후 소비를 얼마나 더 늘렸는지를 측정한 결과 지원금의 약 70%가 소비에 사용된 것으로 분석됐다. 이 교수는 “중앙정부에서 제공한 재난지원금의 소비 진작 효과가 약 30% 정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소비 진작 효과 측면으로만 볼 때 선별 지원, 소득에 따른 차등 지원이 재정 지원의 효과성 측면에서 더 낫다는 것이 연구 결과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국민들이 낸 세금을 기반으로 재정을 지출하는 정부는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해 성과·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그러러면 정책 설계가 보다 분석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지론이다. 정책을 설계할 때 사회 구성원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데이터에 근거해 판단하고 디테일까지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중앙·지방정부의 정책 결정이 여전히 데이터가 아닌 거대담론으로 결정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은 재난지원금 정책이나 경제정책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복지 정책, 과학기술 정책, 부동산 정책 등 모든 정부 정책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이 교수의 판단이다. 그는 “모든 분야에 걸쳐 데이터에 근거한 구체적인 논의가 전반적으로 부족하다”면서 “정책이 실시된 후 엄밀한 분석을 통해 어떤 점이 효과적이었고 어떤 점을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도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대안으로 정책 설계를 담당하는 행정부 공무원뿐 아니라 한국의 각 분야에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리더십이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 결정 방법을 숙지할 수 있도록 재교육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근거가 있는 정책 수립(EBPM)’ 이라는 이름으로 연방정부에서 데이터 수집, 통계 분석, 성과 평가 및 환류 과정을 2017년과 2019년에 각각 도입했습니다. 특히 미국 교육부는 지난달 최고 이코노미스트 제도를 신설하고 교육과 노동경제학 전문가인 조던 마쓰다이라 컬럼비아대 교수를 임명했는데요. 교육부가 밝힌 임명 이유는 ‘데이터 분석과 정책 실험을 이용해 정책을 결정하고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국은 이미 1980년대부터 개별 정책에 대해 과학적 정책 평가, 이른바 빅데이터를 이용한 분석이 실시됐어요. 이 같은 정책·사회 운영의 과학화는 미국과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빈민 구제 정책이나 저개발국 지원 사업 등 개발 정책과 관련해서도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에서 2000년대 초부터 도입돼 이미 시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인터넷 강국이자 전자정부 분야에서도 앞선 나라로 평가되고 있음에도 각종 정책 결정이 데이터에 기반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 교수는 이에 대해 정보통신기술(ICT)을 어떻게 사회 활동에 활용할지를 관할하는 정책, 즉 거버넌스 측면에서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가 지목한 첫 번째 요인은 정책 담당자의 역량 부족이다. 여러 정부·공공기관들이 데이터를 모으고 공개하지만 많은 경우 데이터의 질이 낮아 현실에 도움이 될 만한 의미 있는 분석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정보 보호 문제로 외부 연구자들에게는 데이터가 공개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럴 때도 정부 내부에서 행정자료를 이용해 엄밀한 과학적 분석을 진행하고 그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정책을 개선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데이터의 질이 낮은 이유는 다양하지만 정부 부처 실무자가 실제로 데이터를 분석해 의사 결정을 해본 경험이 없는 것이 주요 요인”이라면서 “의사 결정자들에 대한 재교육이 절실한 이유"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두 번째 이유로 정치적 위험을 꼽았다. 정책 결정자 입장에서 어떠한 정책이 효과성을 가졌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자신의 커리어나 정치 생명에 위협이 돼서는 안 되고 사전적으로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던 경우가 아니라면, 즉 ‘신의성실’ 노력을 충분히 기울였음에도 기대한 효과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해당 정책을 설계하고 도입한 담당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10위의 국내총생산(GDP)을 기록하는 선진국이지만 각종 안전사고 등 예방이 충분히 가능한 후진국형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디어에서 정치인들이 책임자를 추궁한다고 떠들썩하지만 시간과 장소를 달리할 뿐 비슷한 문제가 계속 발생하죠. 이러한 문제는 책임자 몇 명 때문에 일어났다기보다는 근본적으로 거버넌스 체계, 인센티브 구조 왜곡으로 생긴다고 봅니다. 그 인센티브 구조를 바꾸려면 의사 결정자들이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개선하도록 해야지 마녀사냥감이 되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가 과학적 근거에 기초한 정책 결정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결국 주권자인 국민이 선거를 통해 ‘푸시(push)’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들이 정치인 등 이른바 사회 엘리트들에게 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한 성과를 내보이라는 압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요구한다면 선거를 치르는 정치인들은 좋든 싫든 그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고 정무직인 행정부 수장들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소속 정당이 어디인지, 혹은 인기 스타같이 홍보에 기초해 선거의 당락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과거 어떠한 정책과 어젠다를 추구하고 입안과 실행에서 성과를 거뒀는지에 대해 국민들이 정보를 요구하고 이에 근거해 선거 결과가 결정된다면 결국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She is
△1975년 서울 △1998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현 경제학부) △2008년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 △1998년 제42회 행정고시 △1999~2002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국 △2008년 메릴랜드대 경제학과 조교수 △2012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방문연구원 △2015년 일본 히토쓰바시대 방문교수 △2016년 서강대 경제학과 부교수 △2017년 일본 와세다대 방문교수 △2020년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2016년 한미경제학회 ‘젊은 이코노미스트상’ △2020년 한국경제학회 ‘응용마이크로이코노미스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