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태리에게 영화 '외계+인'은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었다. 복잡한 캐릭터를 표현할 때 힘을 빼는 건 오히려 어려운 일. 김태리는 관객들에게 보다 쉽게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단순하지만 탄탄하게 캐릭터를 만들었다. 이제 조금씩 힘을 뺀 연기를 하게 됐다는 그는 점점 여유를 찾아가는 중이다.
'외계+인'(감동 최동훈) 1부는 고려 말 소문 속의 신검을 차지하려는 도사들과 2022년 인간의 몸속에 수감된 외계인 죄수를 쫓는 이들 사이에 시간의 문이 열리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김태리가 연기한 이안은 630년 전 고려시대에 권총을 쏘면서 일명 '천둥 쏘는 처자'라고 불린다. 시공간을 초월한 작품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제가 원래 '분에 넘친다'는 표현은 싫어해요. 세상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신에게 간택된 뉘앙스가 싫어서 최대한 이런 단어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최동훈 감독님의 작품을 제안받았을 때는 꼭 이 말을 쓰고 싶어요. 영광스러웠고, 분에 넘친다고 생각했습니다."(웃음)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도 생각나요. '외계+인' 세계관이 워낙 방대해서 처음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직관적으로 바로 이해되더라고요. 제가 시나리오를 굉장히 잘 읽는 편이라 그런가 봐요. 장면의 의도나 신의 존재 이유, 캐릭터가 왜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지, 갈등의 서막이 어디고 클라이맥스가 어딘지 등이 잘 보여요. '외계+인'은 복잡했는데, '어떻게 이만큼 잘 묶어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깔끔했어요. 올이 풀린 거 없이 잘 땋은 느낌이었습니다."
이안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캐릭터다.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곳을 갔으며,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는 인물. 김태리는 복잡한 설정을 지닌 캐릭터기에 오히려 단순하게 생각하려 노력했다고.
"그냥 이안 그 자체로 이해하려고 했어요. 복잡하게 생각하려면 정말 한도 끝도 없잖아요. 과거와 현재, 부모님에 대한 생각, 로봇에 대한 생각, 고향 등 굉장히 많은 서사가 있죠. 물론 많은 레이어를 쌓자면 쌓을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이 쓸데없더라고요. 박찬욱 감독님 인터뷰 중에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캐릭터에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담는 건 없다'예요. 좋은 건 두 가지 감정을 빠르게 바꾸는 거지, 한 번에 보여주는 건 무리예요. 이 말을 듣고 더욱 간단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안은 마음과 정신이 정말 큰 아이여서 1차원적인 모습으로만 해석되더라고요. 정의롭고 선한 캐릭터 말이에요. 그런데 저는 제 캐릭터들에서 많이 보였던 것들이 읽히면 짜증 나요. 그래서 어떻게든 허술한 면, 인간적인 면, 약한 면을 찾으려고 했어요."
한마디로 이안은 강단 있는 캐릭터다. 자신이 옳다고 믿은 신념은 놓지 않고, 한 번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불사할 정도다. 김태리는 이렇게 강단 있는 캐릭터를 만난 것에 대해 얼굴과 목소리 덕이라고 돌아봤다.
"제 얼굴이나 목소리에 단단함이 깃든 것 같아요. 목소리 톤만 들어도 조용한 사람, 예민한 사람, 섬세한 사람 등으로 나뉘잖아요. 제 목소리는 단단하고 약간 고집이 있을 것 같으면서 털털해요. 약간 밤톨 같은 느낌이죠. 그래서 '미스터 선샤인'의 고애신,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나희도를 만난 것 같아요."
김태리는 자신이 해석한 이안을 토대로 표정 연기, 액션 등의 디테일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최 감독이 '순간을 정지시키는 표정'이라고 극찬한 김태리의 액션신은 '외계+인'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김태리는 "시적이고 예쁜 말"이라고 감사함을 표하면서 의도하지 않은 표정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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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으로 지은 표정은 아니에요. 그냥 집중했을 뿐이죠. 엄청 빠른 목표물을 노려야 되는 장면이었는데, 여기에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면 무릎이 갈리는 지도 모르는 수준이 되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표정이었어요. 또 이걸 촬영 감독님이 잘 담아줘서 예쁘게 나온 것 같아요. 긴장감 있고 예리하게 담아주셔서 가능했습니다."
액션을 위해서 총기 사용법부터 기계 체조까지 다양한 종목을 익혔다. 10년 동안 총과 함께 살았다는 설정인 이안 캐릭터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손에 익히려고 노력했다. 또 다치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 기계체조까지 섭렵했다.
"기계체조 동작이 정확하게 들어간 액션은 없었어요. 그래도 기계체조를 통해 다치지 않는 법과 어디에 힘을 주고 버텨야 되는지에 대해 배웠죠. 제가 여러 가지 운동을 짧게 짧게 해봤는데, 기계체조와 가장 잘 맞는 것 같아요. 앞으로 기계체조 덕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려시대 의복은 이런 김태리의 액션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체구가 작고 마르면서 곧은 선을 지닌 그는 어떤 동작을 해도 딱딱해 보인다는 고민을 갖고 있었다. 나풀나풀 거리는 고려시대 의복은 이런 그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에 적합했다. 의복이 펄럭이면서 펼쳐지는 액션은 김태리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무용을 한 사람들 보면 엄청 유려하잖아요. 그런데 전 딱딱해서 어떤 동작을 아무리 정확하게 해도 조금 촌스러워 보이는 면이 있어요. 그런데 의상이 촌스러움을 덮어주고, 세련되게 만들어줬죠. 전 이렇게 절 도와주는 소품과 헤어가 좋아요. 제가 원래 몸에 붙어 있는 걸 활용하는 연기를 좋아해서 더 그런 것 같아요."(웃음)
촌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던 김태리는 자신의 연기도 어떻게 보면 촌스러운 것 같다고 자평했다. 이유는 솔직함과 정직함. 그는 비밀이 있고, 사연이 있는 것처럼 연기해야 되는데 감추지 못하는 점이 촌스러운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이 생각한 걸 모두 표현해야 되는 건 아직 여유가 없다는 뜻이라고 정의했다.
"잘하고 싶은 욕구가 커서 여유가 없는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지금 32살인데, 이제야 뭔가 조금씩 여유가 생기는 느낌이에요. 힘을 어떻게 빼야 되는지를 조금씩 알 것 같아요. 제가 원래 컵에 물을 따르면 무조건 흘리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이제야 물병의 입구가 컵에 닿는 게 느껴지고, 손의 스냅도 알 것 같아요. 이렇게 다방면에서 힘을 빼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외계+인'을 통해 성장하고 배운 점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법과 사랑을 주는 법을 배웠고, 이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도 깨달았다고. 연기적으로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배운 점이 컸다.
"'외계+인' 직후 인터뷰를 했는데, 사랑이 가장 큰 화두였어요. 과거의 전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지금은 사랑을 받는 법을 알게 됐죠. 이제는 사랑을 주는 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주변에서 칭찬을 하거나 애정을 주면, 예전에는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요. '나는 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가치 있지 않은데 저들이 나의 이면을 몰라서 저렇게 말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컸으니까요. 이제는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 싶어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저를 많이 사랑해 주니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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