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내 반발을 무릅쓰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원유 증산을 요청했지만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OPEC+)는 되레 증산 규모를 역대 최저 수준으로 줄였다. 미국의 원유 재고가 늘어 3일(현지 시간) 국제유가는 내렸지만 OPEC+의 증산 급감에 가격 상승 압력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3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OPEC과 러시아 등 비(非)OPEC 주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가 이날 정례 회의 후 9월 원유 증산량을 하루 10만 배럴로 정했다고 밝혔다. 이는 7·8월 하루 증산량(64만 8000배럴)의 15%에 불과한 규모로, OPEC 역사상 가장 적은 증산량이다.
OPEC은 코로나19 재확산과 각국의 금리 인상에 따른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에 ‘무늬만 증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OPEC+의 증산 여력 자체가 부족한 점도 이유다. 2010년대 미국의 셰일가스 붐과 2020년 초 터진 코로나19 여파로 산유국들이 원유 생산 관련 설비투자를 줄인 탓에 쉽게 증산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날 회의 후 OPEC+는 “추가 생산 여력이 많지 않은 상황이므로 이를 매우 신중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OPEC+의 주요 회원인 러시아의 입장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서방 제재로 원유의 절대 수출량이 줄어든 러시아는 유가가 올라야 판매 수익을 보전할 수 있다.
미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 후 “8월 3일 OPEC+ 회의에서 증산을 기대한다”며 희망이 불씨를 이어왔다. 회의 하루 전인 2일에는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에 총 52억 달러 어치의 무기 수출 재개를 승인하며 이들 국가의 환심을 사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큰 의미 없는 수준의 증산 결정에 바이든 대통령이 체면을 구겼다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원자재 시장 분석기업 케플러의 맷 스미스 애널리스트는 “바이든 행정부에는 굴욕”이라고 꼬집었다.
그럼에도 이날 국제유가는 미국의 원유 재고가 늘어난 영향으로 하락 마감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이날 배럴당 90.66달러로 전 거래일보다 3.98% 내리며 2월 10일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브렌트유도 배럴당 96.78달러로 3.74% 내렸다. 이날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달 29일로 끝난 한 주간 원유 재고는 전주 대비 446만 7000배럴 늘어 시장의 예상(70만 배럴 감소)을 뒤집었다.
하지만 향후 OPEC+의 증산 여력이 부족해 유가가 상방 압력을 받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많은 회원국이 능력치 내에서 최대한의 생산을 하고 있지만, 원유 가격이 떨어질 경우 생산량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외환중개업체 오안다(OANDA)의 선임 애널리스트인 에드워드 모야는 “경기 침체 우려에도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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