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애호가였던 고(故) 이건희(1942~2020) 회장은 인상주의 대표 화가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을 거실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대상의 형태와 색채가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포착하고자 했던 모네는 수련 연작만 250여 점 그렸다. 이 작품을 그린 1917~1920년의 모네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때이기도 했는데, 하늘·연못·구름이 수련과 뒤섞여 평면처럼 보이고, 추상처럼 느껴진다. 삼성가(家)는 재산의 사회환원이라는 이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수집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이 작품을 포함시켰다. 지난해 5월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모네의 유사한 작품이 약 450억원(4000만달러)에 낙찰된 적 있지만, 돈의 값어치보다는 예술을 공유하고 향유하는 일에 더 큰 의미를 뒀다.
‘이건희 컬렉션’의 모네 작품이 국민들과 다시 만난다.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특별전이 21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개막한다. 지난해 4월 미술관이 기증받은 1488점 중 해외미술 작품 97점만 따로 모은 전시다. 기증 1주년을 기념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전시에 모네의 작품이 나왔던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96점 모두 처음 공개된다.
출품작의 대부분은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 작품이 차지한다. 90점에 달한다. 피카소는 인물·동물·정물 등 다양한 소재를 도자 그림으로 남겼다. 1956년작 ‘이젤 앞의 자클린’은 피카소의 마지막 여인 자클린 로크를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남부 도자기 공방에서 일하던 그녀는 1953년 피카소의 연인이 됐고 1973년 작고하던 해까지 여생을 함께했다. 피카소가 그린 자클린은 우아하지만 얼굴은 옆모습으로, 눈은 정면으로 그려진 입체주의 스타일이다.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가 점을 반복적으로 찍는 점묘법으로 그린 ‘퐁투아즈의 곡물 시장’은 19세기 유럽의 시장 분위기를 전해준다. 말년의 피사로는 신(新)인상주의 미술 운동에 동참했는데, 그 때 만난 폴 고갱의 재능을 일찍 알아봤고, 증권중개인이 화가로 전향할 수 있도록 조언해줬다. 고갱의 초기작 ‘센강 변의 크레인’을 나란히 감상할 수 있다. 파리 도심이 아닌 근교의 전원 풍경을 그리던 고갱은 아예 도시를 떠나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이주했고, 강렬한 원시성의 전성기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눈부시게 밝은 인물화는 독서하는 사람의 여유로운 행복을 보여준다. 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즐겨 그린 마르크 샤갈의 ‘결혼 꽃다발’과 초현실주의 화가 호안 미로의 ‘회화’ 등은 관객을 잠시 현실 아닌 꿈과 환상의 세계로 데려다 준다.
기증작들을 20세기 현대미술로 묶기에는 인상주의부터 후기인상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등 중구난방이라 전시기획이 쉽지 않았을 듯하다. 미술관 측은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19세기 말 ~ 20세기 초 ‘아름다운 시절’로 불리는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파리를 생각하며 작품을 배치했다고 한다. 전시는 내년 2월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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